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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Nov 21. 2021

고작 이까짓 알약 몇 개가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니까요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을 처음 먹은 날,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 잠에서 깼습니다.

커피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입니다.

약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내가 꾸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 때문이었을까요.


방안 가득 차있는 땀냄새가 불쾌했지만 가만히 누워있었습니다. 다음 날을 위해 어떻게든 다시 잠들어야 했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잠은 오지 않고 잊고 싶은 괴로운 기억들만 나를 찾아왔습니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버리고 싶은 건 왜 쉽게 버려지지 않는지, 버려도 왜 자꾸 찾아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커튼 사이로 집요하게 파고들던 보랏빛이 자줏빛이 되고 주황빛이 되는 걸 지켜본 후에야 다시 잠들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냉동실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눈가를 식히고 데일만큼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습니다. 느긋하게 뜨거운 물에 몸을 풀며 바디 브러시질도 하고, 주말에만 가끔 하는 헤어트리트먼트까지 했는데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했습니다. 그래도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맞으니 마음이 좀 진정이 되어서 회사에 도착할 때쯤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빨리 찾아온 겨울이 처음으로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 스스로를 마음속으로 칭찬하면서 오전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점심도 꾸역꾸역 잘 밀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하루가, 아니 오후 6시까지는 평소처럼 잘 마무리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점심을 먹고 들어온 후부터 몸이 노곤 노곤해지고 정신이 아른아른했습니다. 꾸벅꾸벅 깜빡 졸다가 깜짝 놀라 깨기를 반복했습니다. 처음엔 밤엔 잠을 못 자서라고 생각했는데 곧 약기운 때문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졸린 게 아니라 기분 좋게 잠이 쏟아졌거든요. 그런 기분을 오래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났습니다. 나는 기억해내려 노력했지만 그만 잠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작 이까짓 알약 몇 개에 사람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는 게 신기합니다.


다행히 퇴근 전에 눈이 떠졌습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모두 개운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보고서는 오전 그대로였습니다. 하루 정도는 월급루팡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USB를 꽂아 쓰고 있던 보고서와 자료를 옮겼습니다. 월급루팡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서면서, 기분 좋게 잠이 쏟아지던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정했던 중고등학교 때의 기억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나는 야외에서 잠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볕 좋은 날, 친구들의 무릎에 누워 눈을 감으면 세상이 온통 노란빛으로 가득 차 기분 좋은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득해지면서 쏟아지는 햇살같이 따뜻한 잠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그렇게 선잠 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이마에 땀이 살짝 맺혀서 뒤척이면 친구들은 바람도 제대로 일지 않는 손부채질을 해주었고, 나는 잠결에 눈을 떠 내 얼굴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손을 보고는 행복감에 젖어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 돌이켜보니 그 이후로는 그처럼 행복하게 잠든 일이 없습니다. 그 충만감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내게 너무나 불행한 시기였던 그때에 이처럼 행복한 기억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얼마나 나은 삶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안전한 나만의 공간이 있습니다. 심지어 못할 줄 알았던 밥벌이도 합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때처럼 기분 좋게 잠들 수 없었던 걸까요. 왜 그런 충만감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요. 어쩌면 행복감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생각 못하고 배가 불러서 이런 투정이나 하고 있는 것일지도요.


절망속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에게 가끔씩 찾아오던 행복과, 희망속에 있는 지금의 나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절망. 


그래도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지금이 괜찮다면 내가 이렇게 약이나 먹고 있었을까 싶네요.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인데 내 삶은 언제나 2개의 선택지만 있는 시험지 같습니다. 아니면 누구나 이러한 것일까요?


약은 신기하지만 한동안은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밤새 뒤척인 걸 생각하니,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졸음이 쏟아질 것을 생각하니 일상이 무너질 것 같아 무섭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병원에 가서 좀 더 상담을 받고 다른 약을 처방받아야겠습니다.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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