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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Aug 16. 2021

또다시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이다-1

허무하게 끝나버린 당신과의 만남에 대하여

서른여섯, 적지 않은 나이에 부끄럽게도 마음을 다쳐버리고 말았다.

그 원인이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연애 때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마음을 더 다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또 이렇게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맞이한 것이다.


밤은 시간을 늘리는 재주가 있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도 도무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결국 나는 우리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곱씹어본다. 어서 해가 떠서 냉소적인 어른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출근을 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새벽 4시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신 생각을 얼마나 더 해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2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과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었고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연락을 이어나갔다. 아는 사람이었던 당신이 친한 사람이 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 겨우 도망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시기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손이 큰 남자를 보면 저 남자한테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혼자 탑승할 때는 위험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했다. 가방에는 친구가 사준 호신용 스프레이를 넣어가지고 다녔고 집 근처에 이르면 그것을 손에 쥐고 어딘가에서 그 쓰레기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해서도 화장실이며 베란다 창을 모두 열어 어디에도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일상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가까운 주변 친구들도 쉽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이전과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쯤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내고 싶어서 자조적으로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벼운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끔찍하고 비참한 경험들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이 스스로를 더 상처 입혔다는 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이런 상태였으니 우리가 제대 로된 만남이 가능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이 나를 이성으로 대하고 있는 것을 느꼈음에도 계속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좋아졌고 당신의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서로 호감이 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관계는 나아가지 못했고 나는 순간순간 당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좋아서 어색하고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바닥을 쳐버린 내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기고 말을  삼켰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만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며 헤어짐을 통보했지만 나는 내가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헤어졌음에도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철역까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갔고 당신은 내가 지하철에 오르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금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당신이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돌이켜보니 내 연애는 하나같이 거지 같았다.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나와 바람을 피운 남자, 친구도 연인도 아니어서 떠나는 걸 잡을 수도 다가오는 걸 막을 수도 없던 남자, 그리고 집착하고 욕하고 때리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긴 쓰레기. 그러나 당신만큼은 유일하게 나 때문이라거나, 너를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니가 날 만나 주지 않아서 난 죽고 싶어, 너무 힘들어, 망가질 거야 같은 협박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만난 후에야 내 모든 연애가 실패했음을, 그리고 내가 연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소질 없는 일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만약에, 혹시라도 또다시 사랑이 하고 싶어지면 그때는 당신같이 따뜻한 사람을 선택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얼마 전, 다른 이유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당신에게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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