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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Aug 17. 2021

또다시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이다-2

허무하게 끝나버린 당신과의 만남에 대하여

그리고 얼마 전, 다른 이유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당신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조금 들떴던 것 같다.


그 후에 이어진 두 번의 만남.


하루는 경의선 기찻길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무얼 했는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힘든 일들은 괜찮아졌는지 이야기하며 서로가 없던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다. 당신은 여전히 매일 산책을 즐기고 따릉이를 타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일에 치이면서도 일이 하기 싫고 때려치우고 싶은 권태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같은데 많은 것이 달랐다.

오늘 치 산책을 하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에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산책을 했다. 날은 조금 더웠지만 당신과 함께 걸으며 고조곤히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벤치에 앉아 달달한 군것질을 했다. 둘 다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둘 다 말뿐이었다.


다른 하루는 당신 집으로 가 당신이 차려준 이른 저녁을 먹고 옥상에 올라 느긋하게 해가지는 것을 보았다. 풍경만 보면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당신 주변은 시간이 천천히 평화롭게 흘러간다. 그래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고 조급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게 좋았다. 그래서 완전한 밤이 되었을 때 당신에 대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신한테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전화번호가 없더라구요. 생각해보니 예전에 술 먹고 전화할까봐 전화번호를 지웠었어요."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늦었으니 가보겠다고 말하고 일어났더라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만남처럼 좋기만 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미 일은 일어났고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 손을 잡았을 거고, 품에 안겼을 거고, 체온을 나눴을 거고, 그렇게 함께 밤을 보냈을 것이다.

나란 인간은 그렇다. 항상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쳐도 나아지는 것 없이 다시 원점이다.


다음 날,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식탁에 앉아 책을 보다 말고 한참 당신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때뿐이었다.

갑자기 바빠진 당신은 연락이 뜸해지다가 나중엔 없어졌다.

나는 기다림을 멈추고 당신과 내 감정이 달랐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지나가는 바람이었고 당신 마음을 아주 잠시 흔들었던 것뿐,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커피를 마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또다시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맞이한 것이다.

 

문득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당신 책이 유난히 슬퍼 보인다. 당연히 다음 만남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당신에게 빌려온 그 책은 두번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몇년 째 베란다 수납장에 들어있는 당신의 목도리처럼. 

한동안 나는 그 책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고, 한동안 당신도 내가 선물한 화분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예민하고 키우기 어려운 식물을 선물했어야 했는데 키우기 쉽고 잘 자라는 식물을 고른 것이 맘에 걸린다.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당신은 가끔 내 생각을 할까. 당신에게 불편한 기억으로 남진 않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이제 나에게 당신은 좋기만 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기만 한 기억은 아니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에게 당신은 한꼬집의 아쉬움과 한큰술의 씁쓸함이 들어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니 부디 당신도 나와 같기를.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이 오롯이 당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여름은 지독하게 덥고,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으며, 나는 아직 창문을 열고 잘 용기도 없다. 그러니 내가 이 날씨에 잠을 푹 자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가을이 오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고 이 울렁증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지금이 여름의 시작점이라는 게 절망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절망 끝엔 언제나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희망이 있어, 고통과 괴로움과 아픔과 절망 따위 모두 잊고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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