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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Sep 06. 2021

원나잇 온리 -2-

-하룻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나 보다-

그때, 네가 나에게 다가왔다.


네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네가 나에게 다가오기 전부터 너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머리카락과 피부색이 나와 같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쩐지 나와 같은 언어로 말할 것만 같은 남자가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위화감없이 어울리면서 탱고를 추는 모습이 신기해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하지만 쳐다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너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디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라고 생각하길 바라면서. 그러다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너를 찾다가 또 한 번 너와 눈이 마주쳐버렸을 때, 너는 나를 보면서 활짝 웃었고 나는 고개를 돌릴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니 내가 너를 끝까지 거절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작은 다르지 않았다. 너는 함께 춤을 추자고 했고 나는 탱고를 출 줄 모른다고 하며 거절했다. 너는 괜찮다고 네가 알려주겠다고 했고 나는 고맙지만 단지 보기만 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너는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한 번은 춰봐야 하지 않겠어?  컴온, 컴온."

하면서 두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그때 내가 너의 손을 잡았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있었고 우리는 함께 홀 중앙에 서 있었다.


너는 내 손을 끌어다가 너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너의 손을 내 등에 살포시 얹었다. 척추를 따라 너의 온기가 퍼져나가서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저릿했다. 이 정도 전율에 이 정도 거리면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빛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다른 손을 맞잡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몸을 잘 못 가눠서 사람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혹시나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서 크게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됐지만 나의 움짐임은 네 안에서만 허락된 것이어서 결코 너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너는 나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움직였기 때문에 다행히 내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자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물리적인 거리가 먼저였을까. 감정적인 거리가 먼저였을까. 이것 역시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내 등에 얹어진 너의 손이 좀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아득해져서 너의 어깨에,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넓은 홀, 사람 가득한 그곳에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조명이 켜진 듯 너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나는 너의 품에서 안겨서 네가 보내는 신호를 따라 움직였다. 나무토막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자명했지만 너는 계속 잘한다, 좋다 연신 칭찬을 해서 날 웃게 만들었다. 우리는 춤을 추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멀티태스킹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리고 영어도 못하고 스페인어는 더 못하는 사람이라 고장 난 기계처럼 계속 버벅대며 띄엄띄엄 단어들을 내뱉었는데,  너는 문맥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내 말을 다시 재배열하고는 그게 맞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탱고에 대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4곡 정도를 함께 추었으니 고작해야 십 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는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네가 유학생이거나 워킹홀리데이 체류자, 장기 여행자 신분의 한국인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국적을 알면 네가 당연히 우리나라말로 '한국사람이에요? 저도 한국에서 왔어요' 하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말했음에도 계속 영어로 말을 했다. 왜 한국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함을 느꼈을 때, 너는 나에게 어떻게  여기에, 아르헨티나에 올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너는 이곳에 사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던 것이다. 머리카락 색깔, 피부 색깔로 너를 판단했다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는 지구 반대편, 세상의 끝이라고. 나는 언제나 세상의 끝에 와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이곳엔 탱고가 있고 나는 탱고를 사랑한다고. 


마지막 음악이 끝난 후 우리는 뺨을 맞대고 포옹을 했다. 분위기를 바꾸는 음악이 흘렀고 주변이 밝아졌다.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몸을 떼고 오래도록 그리워한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 뺨을 어루만졌고 나는 그 손길이 좋아 니 손에 내손을 얹고 얼굴을 부비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너의 친구들이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망부석처럼 계속 그곳에 서있었으리라.

너의 친구들은 나를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가브리엘, 미카엘 뭐 이런 천사 이름을 한 너의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나와 가까운 순서대로 볼인사를 했는데 마지막 한 여자애만이 내게 볼을 내밀지 않고 안 좋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너와 춤을 추었던 여자애였다. 그 애는 너의 팔을 붙잡고 귓속말을 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너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둘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너와 춤을 추면서 우리의 우연한 만남이 운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는 다시 지구 반대편에서 필연적으로 만나 서로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아마 너의 피부색, 머리카락 색 때문이었겠지. 그러나 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바람은 순시 간에 바래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 밤, 단 몇 시간뿐. 그마저도 이제 얼만 남지 않았다. 나는 해가 뜨면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러니 너와 그 여자애가 무슨 사이인지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언제나 운명이 아닌 게 되어버리곤 했는데, 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지다가, 아직까지 운명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가야 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와 몇몇 친구들이 나를 따라 나왔다. 우리는 다시 볼인사를 하며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왜인지 자꾸 대화가 이어져서 한참을 거리에서 서 있었고 그 사이 나는 헤어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너는 함께 다른 밀롱가를 가자고 했지만 나는 너무 늦었다고 가야만 한다고 했다. 너의 친구들은 아쉬워하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너와 나는 누구도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다. 우리는 잠시 걷기로 했다. 

낮은 반팔을 입고 다닐 만큼 더웠는데 밤은 제법 쌀쌀했다. 내 손끝을 스친 너의 따뜻한 손을 잡은 것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거리는 인적도 없고 지나가는 차조차 없어서 지구 상에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남은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마지막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가올 태양을 피해, 단 1초라도 이 밤을 늘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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