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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Aug 18. 2021

원 나잇 온리  -1-

-하룻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나 보다-

너를 만난 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처음엔 순전히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나는 아르헨티나에 뭐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우리나라에서 딱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세상에서 가장 먼 곳. 이 이유 하나가 아르헨티나를 꿈꾸게 했다. 하지만 가보고 싶은 다른 나라들도 많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가 일 순위는 아니었다. 나는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도 봐야 했고 영국에 가서 스톤헨지와 영국박물관도 봐야 했다. 인도에 가서 깨달음도 얻어야 했고 프랑스에 가서 퐁네프 다리 위에서  페트병에 든 와인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숙도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나라를 재껴두고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오로지 피아졸라와 탱고 때문이었다.



쓸쓸한 공기를 머금은 반도네온 소리와 가늘고 위태로운 떨림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현악기 소리,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춰 격정적으로 때론 애절하게 춤을 추는 남녀 무용수. 나는 그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첫날밤, 나는 숙소 직원에게 주변에 밀롱가-탱고 클럽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 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 주변에 밀롱가는 없어. 왜 밀롱가에 가려는 거야? 탱고는 지루해"

라고 말해서 날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나는 아르헨티나는 탱고의 나라라고 우기 듯 말했지만 숙소 직원은 웃으면서 그건 나이 든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거라고, 젊은 사람들은 팝을 듣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그 직원의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떠나오기 전 티비에서 본 아르헨티나는 분명 언제, 어디에서든 탱고가 흘러넘쳤다. 길거리 악사들이 탱고를 연주하면 지나가던 사람, 카페테라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나와 탱고를 추었고 때로는 전문 댄서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영화 해피투게더에서도 나오지 않았던가. 부엌에서 탱고를 추는 장국영과 양조위, 탱고바에서 탱고를 추는 장국영과 낯선 남자.

나는 밀롱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일단 관광객을 위한 탱고바와 카페, 공연장을 돌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 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아무리 헤매어도 밀롱가는 보이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만 할 뿐이었다. 첫 숙소의 직원이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악을 듣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놈의 세계화, 얼어 죽을 놈의 지구촌.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오로지 탱고를 추겠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여행경비를 쪼개 드레스와 볼레로, 구두를  사버렸다. 탱고 공연장에서 진행하는 탱고 강좌에 참여해 기본 스텝도 배웠다. 그리고 이미 아르헨티나에 오기도 전에 잔뜩 들떠서 구매한 치렁치렁한 귀걸이와 색조화장품도 캐리어에 구겨 넣어왔다. 나는 숙소에 그것들을 쭉 늘어놓고 아르헨티나를 떠나기 전, 반드시 밀롱가에 가고야 말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함께 간 친구-이 친구는 탱고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내가 밀롱가를 찾아 헤맬 때 숙소에 남아 휴식을 취했다-가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여 핫하다는 밀롱가를 찾아내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결국 마지막 날, 나는 밀롱가에 가게 된 것이다.


나는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들여 한껏 치장을 하고 숙소를 나섰다. 어디 가냐고 묻는 숙소 직원한테 밀롱가에 간다고 하니 택시를 불러주었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미 하늘은 까맣게 변해있었다. 직원은 나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하며 택시 뒷문을 열어주고는 볼을 내밀었다. 나는 제법 능숙하게 볼인사를 하고

택시에 올라 밀롱가 주소가 적힌 종이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기사는 길을 못 찾겠는지 창을 내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며 찾아가다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스페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왠지 그 말이 내리라는 말 같이 느껴졌는데 밤은 이미 늦었고, 밀롱가에 가야 하니 택시에서 내릴 수는 없었다. 나는 계속 아돈 언더 스탠을 반복하며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택시기사는 한숨을 쉬더니 결국 다시 차를 몰았고 지나던 사람들에게 몇 번 더 물어본 후에 다행히 밀롱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들뜨고 긴장된 마음을 안고 밀롱가로 들어갔다. 내가 꿈꿨던 아르헨티나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출입구 바로 옆에 있는 무대에서는 악사들이 탱고를 연주하고 있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둘씩 손을 잡고 홀 구석구석을 여행하듯 돌아다니며 탱고를 추었다. 아무리 봐도 제자리에서 춤추는 것 이상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인구밀도였는데 신기하게도 다들 부딪히지 않고 물 흐르듯 움직였다. 나는 그 광경을 서서 한참 바라보았다. 그 광경이 황홀기도 했지만, 홀 끝에, 그러니까 무대 맞은편에 바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 맥주나 와인을 한잔 마실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가는 순간 모든 물줄기가 멈추고 엉켜서 개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모두를 위해  알코올을 포기하고 홀 가장자리 벽에 붙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사람들이 나를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랬다. 이 밀롱가엔 외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였다.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아는 체를 했다. 편한 복장으로 탱고화를 넣은 가방 하나만 달랑달랑 들고 와서는, 홀에서 갈아 신고 춤추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심지어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파트 단지에 있는 헬스장, 카페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갑자기 한껏 치장하고 나타난 외국인이라니. 시선이 몰리는 것도 당연했다.


탱고를 청할 때는 우선 서로 눈을 맞춰야 한다. 눈을 맞춘 다음,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 춤을 청하고 여자는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춤을 청하면 남자는 응해야만 한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남자들과의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그저 구경하러 온 관광객-이라고 하기에는 또 옷과 머리와 구두가 투머치였다-입니다 하는 표정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제발 말 걸지 말아 주세요, 탱고를 추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못 출 것 같아요. 제발.... '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지나다녔다. 그때 내 맞은편에 어떤 여성분이 앉았고 나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다.


"네 신발 너무 예쁘다."

"고마워. 네 신발도 예뻐"

"진짜? 근데 네 신발은 특별해 보여."

"예쁜데 굽이 너무 높아서 좀 불편해"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내 또래로 보였고 구두며 옷을 계속 칭찬해줘서 즐겁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시작이었다. 한 명, 또 한 명, 남자들이 같이 탱고를 추자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눈도 맞추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탱고를 출 줄 모른다, 단지 보러 온 거다 라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했고. 그들은 몰라도 괜찮다며 자신들이 탱고를 알려주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손사례를 치며 계속 거절하고 또 거절했다. 한 10명 남짓 거절했을까? 그러고 나니 말을 걸어오는 남자가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탱고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한번 출 걸 그랬나,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이렇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무해졌다.


그때, 네가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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