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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Sep 27.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17

서부 해안 절경을 만끽하며 카사사에 입성하다

2019.4.4 (목)


가고시마에서의 첫 원정 숙박 라이딩 날 아침이 밝았다. 지금까지 가고시마에서의 라이딩이 특정 지역을 갔다가 그날 다시 가고시마 시내로 돌아오는 당일치기 형태였다면, 오늘 라이딩은 기존과는 조금 다르게 가고시마 시외 지역에서 1박을 하면서 여러 지역을 한 번에 투어링 하고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이번 1박 2일 라이딩은 오늘 가고시마중앙역에서 이치키역(市来駅)으로 기차점프를 한 후, 그곳에서 270번 국도를 타고 쭉 내려가 미나미사쓰마(南さつま)를 거쳐 카사사(笠沙)에 도착해 1박을 한 후, 다음 날 카사사에서 226번 국도를 타고 마쿠라자키(枕崎)를 지나 이부스키(指宿)에 도착해 기차점프로 가고시마에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번 일정을 구상하는 데 있어 지난번 이치키쿠시쿠노 파라곤 카페에서 만난 유키상의 도움이 컸는데, 아마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번 1박 원정 라이딩은 없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번 라이딩 여정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고시마 한 달 살기 여행 계획을 짤 때만 해도 미나미사쓰마는 꼭 가봐야지 했던 곳은 아니었다. '투르드미나미사쓰마'라는 자전거 대회가 있다는 것 외에 인터넷 상에 지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대회 코스라도 달려볼까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마저도 정보를 찾기 어려워 계획을 못 세웠었고, 가고시마에 와서도 가보긴 해야 하는데 계획을 어떻게 세워 가봐야 하나 계속 고민만 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 혹시 몰라 자전거가 취미인 유키상에게 투르드미나미사쓰마 대회 코스 정보를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친절하게도 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 정보를 찾아서 보내주었다. 지도를 보니 미나미사쓰마에서 출발해 해안가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쭉 내려가다 마쿠라자키가 얼마 안 남은 지점에서 위쪽으로 북향해 다시 미나미사쓰마로 돌아오는 코스였던 것이었다. 마쿠라자키도 가고시마에서 가기에 위치가 애매해 어떻게 엮어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대회 코스대로 똑같이 갈 필요 없이 카사사에서 곧장 마쿠라자키로 가면 일정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마침 유키 상이 본인이 평소 즐겨 타는 해안 코스라고 추천해 준 국도 270번 해안도로도 생각 나, 그렇다면 270번 국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치키역에서 출발해서 미나미사쓰마를 거쳐 마쿠라자키를 찍고, 내친김에 이부스키까지 가는 해안을 쭉 타고 도는 코스로 일정을 짜보 자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하루에 다 도는 것은 무리니 전체 루트 중간 어디쯤에서 1박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숙소는 여러 군데를 알아보다가 d travel 책자에서 본 '카사사 에비수(笠沙 恵比寿)'라는 호텔로 결정하였다. 위치도 카사사로 전체 루트 중간쯤에 위치해있고, 건물 디자인이 독특하고 호텔과 바로 연결된 부두에서 출항해 바다 석양을 볼 수 있는 쿠르즈 체험도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1박을 해야 되다 보니 아무래도 당일치기 라이딩 때보다 옷가지, 세면도구, 휴대용 공기 주입기 등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라이딩과 외박에 필요한 것들을 새들백(자전거 안장 아래 거치하는 가방)과 백팩에 잘 분배해 넣고, 빠진 물건들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점검한 후 호텔 밖을 나섰다. 


아침 7시에 일어나 1시간 반 정도 출격 채비를 했더니 출발 전부터 진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는 설레임에 화이팅을 외친 후, 가고시마중앙역으로 이동하였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제는 자전거 분해 패킹에 숙달이 됐는지 능숙한 조교와 같은 속도로 후다닥 패킹 작업을 마치고, 플랫폼으로 내려가 이치키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맨 뒷칸 운전실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자전거를 지켜보면서 가기 위해 역방향 1인 좌석에 앉았다. 오전 9시 반 출발 기차였는데 출근이나 등교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차내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이치키역까지 가는 동안 창 밖 너머로 지난번 미야마-이치끼쿠시쿠노 라이딩했을 때 탔던 도로나 지나쳤던 가게들이 이따금씩 보였다. 그때의 감동과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반갑기도 하였고, 그때만 해도 기차점프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는데 지금은 몇 번 경험해봤다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나 자신을 보고 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거 같아 뿌듯하기도 하였다. 


출발한 지 30여분 정도 지나 이치키역에 도착하였다. 시골 정감 물씬 나는 역 대합실에서 자전거 조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타이어 공기압을 확인한 후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날씨도 화창하고 햇살도 따스해 라이딩하기에는 최고의 날이었다. 


구글맵에 카사사 에비수 호텔을 목적지로 찍어놓고 먼저 국도 270번을 타기 위해 도로 위에 이정표를 보며 이동하였다. 

봄기운을 만끽하며 시골 동네를 여유 있게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지나가다 학교 내 야구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는데, 이런 시골 학교에도 야구장과 야구부가 있는 걸 보고 일본의 야구 인프라가 정말 대단하구나 괜히 야구 강국이 아니구나를 체감할 수 있었고, 우리도 인프라만 좀 더 받쳐주면 일본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10분 정도 달렸나, 도로 코너를 돌자마자 오른편으로 바다가 쫙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는 거처럼 시원했고 마침 날도 맑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게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풍경에 이래서 유키상이 이 코스를 즐겨 탄다고 했고 나한테도 추천해줬구나를 알 수 있었고, 다시 한번 그의 친절함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를 감상한 후 다시 길을 따라 쭉 내려가는데, 얼마 안 있어 에쿠치하마 해변공원(江口浜海浜公園)이라는 이정표가 보여 어떤 곳인지 궁금해 잠깐 들렀다 가기로 하였다.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횅하긴 했지만,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여기로 오면 딱이겠다 싶었다. 다만 백사장 정돈이 너무 잘 되어 있고 앞쪽에 방파제까지 있어, 마치 바다도 정원 관리하듯 물을 가둬놓은 거 같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바다 구경만 해야지 왠지 물놀이 같은 건 하면 안 될 거 같은 제한되고 절제된 분위기가 우리와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다시 270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였다. 해안을 따라가는 평지에다 뒤에서 바람도 불어줘 주변 자연을 감상하며 속도감 있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쪽 동네도 기리시마 진구처럼 가는 길 주변에 편의점이 보이지 않았다. 물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어쩌나 하고 있는데 마침 길가 식당 앞에 자판기가 보여 잠시 정차해서 물도 구매할 겸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자판기의 왕국'답게 자판기는 군데군데 있어 물 걱정은 크게 안 해도 될 거 같았는데, 편의점이 많지 않아 시골 지역 라이딩 시에는 간식 같은 보급품은 미리 챙겨놔야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수분 보충 후 다시 도로를 타고 내려갔다. 가는 길에 Cycling road라고 쓰여있는 이정표가 보여, 해안을 따라 만들어놓은 자전거 전용도로인가 싶어 이정표를 따라가 보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니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아니고,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옛 기찻길을 활용해 자전거 전용도로로 다시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도로만 있는 게 아니라 예전에 실제 기차역이 있었던 터를 보존해놓고 해당 역에 대한 정보도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당시 모습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옛 기찻길을 자전거 도로나 레일 바이크로 다시 활용하는 사례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해당 기차 노선과 역에 대한 역사적 정보까지 같이 제공해주면 좀 더 유익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중간에 길이 끊긴 듯 보여, 여기서 끝인가 다시 차도를 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안내 표지판을 보니 미나미사쓰마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일단은 좀 더 쭉 따라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도로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마치 이 길을 전세 낸 양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며 달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지금 이 길에 기차가 다닌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도 해보고, 푸릇푸릇한 대지와 모내기를 하고 있는 농부 어르신들을 보니 이제는 진짜 봄이구나를 느끼면서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다 공원 하나가 보였다. 후기아게하마 공원(吹上浜公園)이었는데, 어르신들이 벚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계시길래 잠시 둘러도 볼 겸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공원에서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끼리 운동삼아 게이트볼을 즐기고 다 같이 어울려 이야기하면서 도시락을 드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뭔가 아름답고 이상적인 노년의 생활 모습처럼 보였다. 텐몬칸 공원에서 게이트볼을 즐기시는 어르신들 모습을 봤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 공원이라는 존재가 중요하구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우리도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만큼 거주지 주변에 접근성 좋은 공원 시설이 많이 확충돼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길을 따라 미나미사쓰마로 남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자전거 전용도로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도로가 나왔다. 전용도로를 찾으려고 주변을 맴돌았지만 나오지가 않아, 괜히 시간 소모하지 말고 곧장 차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날 거 같아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평지인 데다가 길도 거의 계속 직선이고 뒤에서 불어주는 바람도 아까보다 더 강해 마치 등에 날개를 단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 양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 경관을 보며 속도감이 있게 라이딩하는 기분이 짜릿하였다.  


후기아게하마 공원에서 30km 정도 되는 거리를 40여분 만에 달려, 오후 2시가 조금 안됐을 쯤에 미나미사쓰마 시내에 입성하였다. 이 곳도 카노야나 이치키쿠시쿠노처럼 쇠퇴하진 않았을까 지방 소멸이 오진 않았을까 했는데, 가고시마 서남부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인지 정돈도 잘되어 있었고, 대도시만큼은 아니어도 주변에서 활기찬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배가 고픈 것도 있고, 마침 시내에 미나미사쓰마 관광청에서 추천한 멘야 히데오 라멘(麺屋 秀ちゃん)이라고 하는 라멘집을 하나 찾아놓은 것도 있어, 거기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가게 옆에 주차를 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의 유동인구 대비 가게 안에 손님들이 생각보다 많아 맛집을 제대로 찾아는 왔구나 싶었다. 하나 의아했던 건 이곳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의 가게 영업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인 것이었다. 이는 점심 장사만 한다는 것인데, 그럼 남는 게 있으려나, 저녁 장사를 안 한다는 건 저녁때 방문하는 손님이 거의 없다는 것인데 여기 사람들은 저녁에 외식을 하지 않고 대부분 집에서 해결하나, 그래도 이문을 떠나 오후 3시까지만 장사를 하면 또 다른 저녁 비즈니스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워라밸만큼은 확실하겠구나, 쳇바퀴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보다 오히려 이것이 날 수도 있겠구나라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았다.  

메뉴는 메뉴판 상단에 있는 라멘으로 주문을 하였고, 관광청 추천 맛집답게 맛이 좋았다. 라멘 한 그릇 먹고 나오니 속이 든든한 게 다시 힘이 샘솟는 듯하였다. 


라멘 가게를 나와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주변 편의점에서 보급품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이치키역에서 이 곳까지 오는 동안 편의점이 전무했던 걸 감안했을 때, 앞으로 이동하는 경로 주변에도 편의점이 없을 거 같아, 내일까지 먹을 에너지 바와 에너지 젤리 같은 보급품을 한 가득 구매하였다.  


미나미사쓰마 시내에서 카사사 에비수 호텔까지는 약 30km. 호텔로 바로 이동하기 전에, 카사사로 가는 경로에 있기도 하고, '투르드 미나미사쓰마' 자전거 대회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후기아게마 해변공원(吹上浜海浜公園)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시내에서 바닷가 쪽으로 이동해 공원에 도착하였다. 후기아게하마 해변공원은 지도 상에서도 면적이 꽤 컸었는데 실제 와서 보니 그 규모가 대단하였고, 단순히 시민들이 쉬거나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인 줄 알았는데, 공원뿐만 아니라 자전거 도로, 축구장, 수영장, 스케이트장과 같은 스포츠 시설, 야외 음악홀 같은 예술 시설, 그리고 방갈로, 오토캠핑장과 같은 숙박시설 모두가 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복합 문화 레저 시설이었다. 

일본은 어딜 가나 지역마다 상징적인 것이 꼭 한 가지는 있었는데, 후기아게하마 해변공원을 보니 미나미사쓰마는 '레저와 스포츠'로 지역 이미지와 경쟁력을 쌓으려는 거 같았고, 투르드미나미사쓰마 자전거 대회도 그 일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보았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잘 가꿔놓은 나무와 꽃들 속에서 여가를 즐기시는 어르신들, 아이와 산책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공원을 둘러보고 카사사로 향하는 226번 국도에 몸을 실었다. 해안 도로라 미나미사쓰마로 향했을 때처럼 계속적인 평지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중간중간 반복적인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라이딩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가는 길에 카사사 에비수 호텔까지 1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의 정보를 보게 되니 반가움과 동시에 이 호텔이 이 정도로 유명한 곳인가, 호텔 선택은 잘했네, 어떤 곳일까라는 기대감과 맞는 길을 가고 있구나, 이 길로 쭉 잘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구나는 안도감이 짧은 시간 동안 이 이정표 하나로 인해 교차하였다. 


이동 중에 보이는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푸른 에메랄드 빛 바다, 시골 정감 물씬 풍기는 어촌 마을, 그리고 여기도 나름 남쪽이라고 위세 등등하게 서있는 야자수들까지, 이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라이딩 여행은 성공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기분이 좋았다. 


카사사 읍내와 몇 개 마을을 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올라가는 동안 옛 도로 자취도 종종 보였는데, 새로 만들어진 도로보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경사도 더 심해 보였다. 공사 전에 왔었으면 위험하고 고생도 좀 했겠구나 싶어, 힘들어도 지금 도로가 그나마 나으니 그걸 위안 삼아 좀 더 힘을 내보자며 헉헉 대며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니 전망소가 나왔다. 타카사키야마 전망소(高崎山展望所)라는 곳이었는데, 경치 감상도 하고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정차하기로 하였다. 전망소에 들어서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감탄사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바다 위에 여러 줄로 길게 펼쳐진 파도가 다 같이 해안으로 밀려드는 모습이 경외롭게 느껴졌고, 저 멀리 바다 뒤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산맥 라인도 주변 풍경과 어울려 장관이었다. 

해안 라인을 위쪽에서부터 쭉 훑어보는데 눈에 익숙한 지형이 하나 보였다.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반에 들렀던 에구치하마 해변공원이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에구치하마 해변공원에서 봤을 때 오른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곳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여기가 그곳이었던 것이었다. 언제 저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나며 지금까지 달려온 루트를 곱씹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위치적으로 사쓰마반도 서쪽 끝자락이고 앞에 시야를 가로막는 섬들도 없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수평선을 볼 수 있었는데, 금빛 햇살을 머금고 있는 바다와 함께 바라보니 그 광경이 신비로워 보였다. 

호텔까지 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여러 군데 세워져 있었는데, 라이딩하는 내내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거 같기도 하였고, 목적지까지 거리가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마치 자전거대회에서 골라인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선수가 된 거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좀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카사사 에비수 호텔에 도착하였다. 이치키역에서부터 약 70km, 6시간을 달려 도착한 것이었다. 

카사사 에비수 호텔은 큐슈 신칸센 디자이너로 유명한 미토오카 에이지라는 사람이 디자인한 곳이라고 하는데,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건물 지붕과 돌 담벼락 등의 외관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았다. 

호텔 프론트에 들어서자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연세 지긋하신 직원 분께서 친절히 맞아주셨다. 예약할 때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미리 아셨는지 체크인 시 전달이 필요한 사항을 미리 영어로 종이에 적어놓으신 것을 건네주셨는데, 그들의 세심한 준비와 배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르즈 체험은 사전에 신청은 했으나 당일 운행 최소 인원 미달로 아쉽게도 할 수는 없었다. 저녁식사를 할 건지 여쭤보셔서 하겠다고 하고 추천받은 '에비수 정식'이라는 메뉴를 사전 주문한 후,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와 여장을 풀었다.  


방은 복층 구조로 일본 느낌이 물씬 났는데, 창 밖 바로 너머로 보이는 항구와 방파제 뷰가 아름답기도 하고 뭔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7시까지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오라고 하셔서, 그전에 대욕장에 가서 몸을 씻기로 하였다. 

대욕장은 같은 층 맨 끝에 있었는데, 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입욕을 즐길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탕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셨다. 탕 모서리 쪽으로 위치를 조금 이동했는데 이 곳에 젊은이가 있는 게 신기하셨는지 나한테 먼저 말을 거시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자전거 여행을 왔다고 하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으나 나보고 일본인처럼 생겼다, 나도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 자기도 젊었을 때 자전거 선수였다 등 친근하게 계속 말을 걸어주셔서 덕분에 탕 안에 있는 동안 지루하지 않고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씻고 나와서 방에 있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1층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d travel 책자에서 '이치동'이라고 하는 구하기 힘든 소주를 이 곳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하여, 안내받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이치동 한잔을 부탁드렸다. 기대했던 만큼 엄청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입씩 목 넘김을 할 때마다 오늘의 노고를 날려버려 주는 깔끔한 맛이었다. 

사전 주문한 저녁 메뉴도 곧이어 나왔다. 이 지역에서 잡은 해산물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재료도 신선하고 맛도 괜찮아 오늘 고생한 거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8시 정도 되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호텔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항구 주변까지 가기에는 거리도 멀고 가게들도 벌써 문을 닫았는지 주변도 컴컴하여, 지금까지 쌓인 누적 피로도 쫙 풀고 내일 라이딩을 위한 컨디션 관리도 할 겸, 아쉽지만 오늘은 일찍 잠에 들기로 하였다.  

가고시마 아파 호텔에 적응했는지 다른 곳에 누워 있으니 뭔가 어색하고 집 떠나 '여행' 온 거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은 어떤 또 다른 드라마가 펼쳐질지 기대해보며 눈을 지그시 감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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