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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Oct 09.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27

7,200년 수령의 조몬스기와의 만남, 평지를 걷는 것 같은 등산로

2019.4.14 (일)


숙소가 위치한 미야노우라에서 야쿠스기 시젠칸(屋久杉自然館)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늦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했던 터라, 어제 저녁 9시가 채 되기 전에 일찌감치 깊은 잠을 청했었다. 하지만, 제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과 부담감 때문에 예민했는지 침대도 불편하고 호스텔 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유독 더 크게 느껴져, 새벽 2시까지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1시간 정도 잠깐 잠에 들었다가 다시 잠에서 깼다. 자야 할 땐 쌩쌩하다가 일어나야 할 때가 다 되니 갑자기 잠이 쏟아져 왠지 지금 다시 잠에 들면 못 일어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금 이르지만 잠도 깰 겸 바로 씻고 준비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방에서 나와 샤워실로 향하였다. 오늘 최소 7~8시간은 걸어야 하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몸을 씻고 나오니 조금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여전히 피곤함이 묻어있긴 했지만 별 일 없이 잘 마무리될 거라며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넣은 후, 방으로 돌아와 같은 방 투숙객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나갈 채비를 한 후 호스텔 밖을 나섰다.  


버스 출발 시각은 4시 46분이지만, 정류장에는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였다. 도로에 지나가는 차량이나 행인 하나 없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새벽이었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셨을 때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새벽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하였고, 무엇보다 이 곳의 새벽을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열었다는 생각에 뭔가 뿌듯하기도 하였다.


출발 시각 10분 전쯤 되니, 꽤 많은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는데, 시끌벅적한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여행의 흥겨움이 한 층 올라가는 거 같았고, 혼자가 아니라 같은 곳을 향해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도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46분 정각에 버스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고,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밖이 아직 컴컴해 이동하면서 주변을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가 평지에서 언덕길로 접어들면서 야쿠스기 시젠칸 그리고 나아가 조몬스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말로만 듣던 조몬스기를 드디어 오늘 보는구나라는 기대와 흥분에 들뜨다가도, 산행이 힘들진 않을지 무사히 별 탈 없이 마무리되야 하는데라는 긴장과 걱정도 동시에 들기도 하였다. 


미야노우라에서 출발한 지 40여분 정도 지난 5시 반쯤에 야쿠스기 시젠칸에 도착하였다.   


조몬스기로 향하는 등산의 시작은 야쿠스기 시젠칸이 아닌 아라카와야(荒川)라고 하는 입구에서부터라 여기서 입구까지 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다. 미야노우라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야쿠시마 내 여러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이 곳에 집결시킨 후 한 번에 다 같이 이동하는 것이 운영 상 효율적이라고 본 것인지, 아니면 업자들끼리 버스 노선 운영 이권을 구역 별로 나눠 먹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대중교통을 불편하게 해 놓고 렌트카 이용을 장려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용객의 편리는 크게 고려되지 않은 거 같아 어제도 그렇고 야쿠시마에서 버스를 이용한 목적지 간 이동은 뭔가 아쉽고 불편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매표소에서 아라카와야 행 버스 티켓을 구매한 후, 5시 40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바로 다시 몸을 실었다. 야쿠스기 시젠칸부터는 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지 버스가 달리는 길의 경사도나 구불거림이 아까와는 달리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것이 맞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얼마 안 있어 도로 주변 숲이 걷히자마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의 높이와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또한, 동이 튼 직후라 그런지 밝아오는 하늘과 함께 구름과 안개가 뒤덮인 주변 산세가 신령스럽게 느껴졌는데, 이것을 보고 야쿠시마를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30여분 정도 산길을 달린 끝에 마침내 조몬스기 산행의 시작점인 아라카와야 등산로 입구(荒川登山口)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도착했을 때 이미 입구에는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대여섯 명 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그룹을 짓고 둥그렇게 서서 그 그룹의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의 구호에 맞춰 몸을 푸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몸을 푼 후 인솔자가 공지 사항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하는 걸 봐서는 등산 동호회에서 단체로 온 거라기 보단 가이드가 대동하는 여행 패키지로 온 관광객들인 거 같았다. 


출발 전 대기소에서 보급 차 간단하게 빵과 우유를 먹은 후, 이들처럼 나도 가볍게 몸을 풀고, 6시 반부터 드디어 대망의 조몬스기 산행을 시작하였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철로가 놓여져 있었다. 과거에 벌채용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로를 트래킹용으로 정비한 길이라고 하는데, 철로 가운데 부분에 나무를 촘촘히 깔아놓아 일반 보도를 걷는 거처럼 걷기 편하였고, (효율성을 생각했더라면 나무가 아닌 다른 자재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무를 사용해 주변 환경과 이질감 없이 마치 애초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 같은 자연스러운 느낌을 연출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폐쇄된 옛 기찻길을 활용할 때 하나의 사례로 참고하면 좋을 거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철로가 조몬스기로 향하는 길이니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 없이 철로만 쭉 잘 따라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대기소에서 보급하고 몸을 푸느라 다른 사람들 대비 출발이 늦었던 것도 있고, 거리는 길지만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한 경사가 완만한 철로 길에서 최대한 소요 시간을 줄이는 게 좋을 듯 싶어, 평소보다 조금 빨리 걷자라는 마음으로 걸음 속도를 조금씩 끌어올렸다. 


얼마 안 있어 앞에 그룹을 지어 이동하는 등산객들이 보였다. 혼자 빠른 속도로 걷다 보니 2~3 그룹 정도를 지나쳤는데, 공통적으로 맨 앞에서 인솔하는 가이드의 속도에 맞춰 걸으면서, 중간중간 멈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등산하면 건강을 위한 육체적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라, '운동 삼아 올라가는 길에 자연 감상을 하고, 정상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안전하게 내려오면 됐지, 굳이 등산하는데 전문 가이드까지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아마 대부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등산 행태를 보니, 전문 가이드가 제공해주는 등산 요령이나 (기존에  관심이 없거나 무심코 지나쳤던) 그 산의 지형적, 역사적 특징 같은 정보를 같이 취하면서 등산을 하면, 기존에 등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에 더해 좀 더 풍성하고 의미 있는 등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등산 가이드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지만, 컨텐츠를 점점 중시 여기는 추세를 감안했을 때, 앞으로 등산 전문 가이드에 대한 수요가 점점 커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같이 해보게 되었다.   


철로를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자연 속에서 끝이 어딘지 모를 철로를 따라 혼자 걷다 보니 마치 철학자가 된 거 마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문득 지금 걷고 있는 이 철로 길이 인생의 축소판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면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꼭 이루고 싶다는 열망과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지의 여부이지, 그것만 있다면 목표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비록 고통스럽고 때론 외로울지라도,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고, 지금의 이 트레킹처럼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뎌 쌓인 걸음들이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도전과 역경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때마다 야쿠시마 철로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나에게 준 교훈을 항상 상기하자고 다짐하면서, 계속 걸음을 재촉하였다. 


철로를 따라 쭉 걷다가 소삼곡교(小杉谷橋)라고 쓰여있는 다리를 건넜다. 흐르는 물은 없었지만 강에 있는 바위 크기가 기괴할 정도로 커서 놀랐는데, 화산 폭발 때 큰 돌덩어리가 날아와 박힌 건지 아니면 물에 의한 자연 침식으로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숲도 그렇고 바위도 그렇고 그 존재만으로도 이 곳은 뭔가 다르구나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예전에 학교가 있었던 터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남아 있는 건물이나 흔적이 없어 안내판에 있는 사진과 설명을 통해 당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학교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마을 규모 그리고 주민과 학생 수를 봤을 때, 당시 이 곳에서의 벌채 사업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철로를 따라 올라갔다. 나무들의 푸르스름함이 점점 진해졌는데, 구불구불한 철로를 따라 걸을수록 주변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점점 미지의 세계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나와 용무도 볼 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주변에 잠시 쉬었다 가는 등산객 중에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분들도 꽤 많이 보였는데, 등산 복장이나 장비 같은 차림새만 봐도 이들의 등산 구력이 결코 짧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젊은이 못지않게 액티브한 노년 생활을 보내시고 있는 거 같아 노년 생활의 질은 젊었을 때부터 건강을 관리하는 습관과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취미 계발의 유무에 따라 좌우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평소에 자기 관리 및 취미 활동에 좀 더 신경 써야겠구나라는 다짐도 같이 하게 되었다. 


스트레칭하면서 몸을 풀어준 후 다시 철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경사가 완만하다고 해도 1시간이 넘게 빠른 속도로 계속 걸었더니 몸에 살짝 피로가 올라왔다. 하지만 몸은 피로해도 숲 속의 맑은 공기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확실히 정신은 맑아지는 거 같아, 사람에게 숲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평소에도 숲을 가까이해야겠다 싶었다. 


한참을 걷다가 저 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뭔가 하고 자세히 보니 원숭이였다. 야쿠시마는 '사람 2만, 사슴 2만, 원숭이 2만'해서 전체 인구가 6만 명이라고 할 만큼 곳곳에서 사슴과 원숭이를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2만 원숭이 중 한 마리를 직접 보니 반가웠고 신기하였다. 다가가기 전에 사라져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봤던 원숭이보다 크기는 작지만 아무래도 야생이라 그런지 몸이 날렵하고 다부져 보였다. 


원숭이를 봤으니 사슴도 볼 때가 된 거 같은데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짐을 풀고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에서 출발해서 약 2시간 동안 8km가 넘는 긴 철로 길을 걸은 후에, 본격적인 오르막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인 오카부보도(大株歩道) 입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다른 등산객들처럼 나도 바닥이 평평한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아 에너지 젤과 초코바 등 간식도 먹고 몸도 스트레칭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잠깐이었지만 쉬는 동안 방전되었던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거 같았다. 

출발 전에 오카부보도가 시작되는 계단 옆 안내판에 '이 곳에서 늦어도 오전 10시에는 출발해라, 여기서 조몬스기까지는 왕복 4시간이 소요되며, 조몬스기에서는 늦어도 오후 1시에는 내려와라'라고 쓰여있는 문구를 보았다. 출발하려고 할 때가 오전 9시가 조금 안됐을 때라 1시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산에서는 무슨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속도감 있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듯 입구에서부터 경사도가 꽤 높았다. 숨이 가빠오긴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등산을 하는 거 같아 오히려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거 같았다.  


등산로를 따라 한 걸음씩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주변 분위기가 철로 길을 지날 때와는 또 사뭇 달랐다. 좀 더 입체적이고 선명한 푸른 이끼, 마치 꿈틀거리는 뱀과 같이 뻗어 나와 땅을 감싸고 나무뿌리들, 그리고 길목 중간중간마다 이 산의 수호신처럼 떡하니 지키고 서 있는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등산로 중간중간 경사가 심하거나 길이 좋지 않은 구간에는 나무로 만든 길과 계단들이 놓여 있었다. 걸음을 내디뎠을 때 나무가 놓여 있는 위치나 높이, 각도가 얼마나 정교한지, 대자연 속이지만 마치 일상 속 평지나 계단을 걷는 거 같이 편하게 걸을 수 있어 이들의 정교함과 세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이들의 본질과 성향을 압축해놓은 모습 같았는데, 다방면에서 아직 우리가 이들에게 배우고 계발할 것들이 많구나를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오카부보도 입구에서 출발한 지 20여분 정도 지난 후,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그곳인가 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윌슨 그루터기였다. 

윌슨 그루터기는 이 그루터기를 발견한 어니스트 헨리 윌슨이라는 미국 식물학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가 1914년에 그루터기를 발견하고 이 그루터기의 추정 수령인 3,000년을 기준으로 다른 나무들의 수령을 추정하게 되면서 야쿠시마 원시림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윌슨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에 의해 언젠가 발견되었겠지만,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야쿠시마가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의 이름을 붙여줄 만한 기념비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거 같았다. 


주변 나무와 풀에 가려 어디가 그루터기인지 몰라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보여 저곳이 그루터기구나 싶어 그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벌목되지 않았더라면 높이가 20m 이상은 되었을 거라고 하는데, 밖에서 봤을 땐 흙더미처럼 보여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루터기 안에 들어와서 보니 그 말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마치 동굴에 들어와 있는 거처럼 내부 공간이 엄청 넓었고 그루터기 아래에서 보이는 나무 둘레 또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였다. 

오래된 수령 때문이기도 하지만 윌슨 그루터기가 더욱 유명해진 이유는 그루터기 아래에서 하늘을 봤을 때 보이는 모양이 하트 모양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하트 모양을 볼 수 있는 스팟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움직여가며 하늘을 쳐다봐보았다. 생각했던 거보다 찾기 쉽진 않았지만, 특정 스팟에서 하트 모양이 눈에 딱 들어왔을 때 정말 하트 모양이라 신기하였고 그 모양도 꽤 예쁜 모양이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루터기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친구들끼리 단체 관광을 오신 일본인 아주머니께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좋은 각도로 찍어 드리기 위해 자세를 숙여가는 열연을 펼치며 몇 장 찍어드렸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고맙다고 하시면서 답례로 견과류와 사탕을 한 움큼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마침 살짝 허기가 져 맛있게 잘 먹었는데, 산에서는 같이 고생한다는 동지애나 전우애 같은 게 생겨서인지 뭔가 상대에게 좀 더 열려 있고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게 되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안개가 자욱해졌는데, 주변의 푸르스름한 이끼와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느낌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오르막 경사도도 좀 더 심해지긴 했지만, 오르기 편하게 잘 설치된 나무 길과 계단 덕분에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올라가는 길 반대편에서 하산하는 서양인들도 꽤 보였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의 대부분이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곤니치와'라고 인사를 하면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일본에 왔으니 재미 삼아 현지어로 인사를 해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인사하는 태도나 억양에서 '상대에게 예를 중시하는 당신 나라에서 나도 당신에게 예를 갖추고자 한다', '나는 이런 당신 나라를 좋아하고 존경한다'라는 톤앤매너가 느껴져, 서양인들이 인식하는 일본의 위상이 어떤지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의 모습과 우리나라에서 여행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비교해보니 확실히 차이가 있는 거 같아, 세계 속 대한민국의 위상이 좀 더 높아지고 일본을 능가하는 날이 어서 와야겠다는 생각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조몬스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나무였다는 다이오스기(수령 약 3,000년)를 지나, 야쿠시마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구역 안으로 진입하였다. 

야쿠시마는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섬 전체는 아니고 지형이 험해 벌채가 어려워 훼손되지 않았던 섬의 약 20% 지역에 한해 선정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았다는 세계자연유산지역 안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타임머신으로 타고 문명 이전으로 온 거 같아 뭔가 감개무량하였고, 지금까지의 야쿠시마도 신비했는데 세계자연유산 지정 구역은 어떤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을지 생각을 해보니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세계자연유산 지역이라는 걸 알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주변에 보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오래되어 보이는 건 기본이고, 나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오히려 느타리버섯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싶을 정도로 그 모습들이 괴상하였다. 이런 게 몇 백년 몇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은 나무들의 모습인가 싶어 신기하였고, 그렇다면 7,000년이 넘었다는 조몬스기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함에 조몬스기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간절해졌다.  


조몬스기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는지 얼마 안 있어 눈 앞에 전망대 데크가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어 왠지 그곳이 맞을 거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고대하던 조몬스기에 도착한 것이었다. 오카부보도에서 출발한 지 약 2시간이 지난,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에서 출발한 지는 약 4시간 20분이 지난 후인 오전 10시 45분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먼저 남쪽 전망대 데크로 올라가 조몬스기를 바라보았다. 나무와 전망대 간에 거리가 있어 실제 대비 체감되는 나무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긴 했으나, 마치 세상 만물의 이치를 다 꾀고 있는 이 세계의 끝판왕 같이 위엄 있게 서 있는 조몬스기의 자태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떻게 7천 년이 넘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자연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몸소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각도에서 조몬스기를 조망할 수 있는 북쪽 전망대 데크에도 올라가 보았다. 갑자기 안개가 더 짙어져 그 모습이 신성스러워 보였는데, 조몬스기를 바라보며 앞으로도 무탈하게 더 오래 살아 있기를 기원해보고, 나아가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여행의 무사한 마무리와 앞으로 펼쳐질 나의 앞날에 성공이 있기를 같이 염원해보았다.   


조몬스기를 둘러보고 하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산하려고 했을 때가 11시 15분쯤이었는데, 늦어도 오후 1시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안내문구를 고려했을 때도 그렇고, 시간상 여유가 있어 원래는 천천히 내려가려고 했으나, 비가 잠잠해질 생각은 안 하고 점점 거세지는 거 같아 하는 수 없이 빠르게 하산하기로 하였다.      


내리막 길이기도 했지만, 비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급했는지 조몬스기에서 출발한 지 1시간 10여 분 만에 생각했던 거보다 빨리 오카부보도 입구로 다시 내려왔다. 먼저 내려온 등산객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군데군데 천막을 쳐놓고 그 아래에서 휴대용 버너에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는데, 공기 중에 돌아다니는 라면 냄새며 먹는 모습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 지 그들에게 가서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방수가 되긴 하나 계속 비를 맞으면서 걸었더니 체온이 살짝 떨어진 것도 있고, 경사가 가파른 산길을 무사히 내려왔으니 이제는 잘 닦여진 철로 길만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온 몸에 피로감이 확 몰려와 어서 빨리 호스텔에 복귀해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지친다고 계속 비를 맞으며 천천히 가는 것보다, 최대한 빨리 아라카와야 등산로 입구로 가서 거기에 있는 대기소에서 쉬는 편이 나을 거 같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집중시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1년 내내 비가 온다는 야쿠시마에서 내리는 비를 탓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오랜만에 숲 속에서 비를 맞으며 걷는 기분도 색다르고 운치 있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라카와야 등산로 입구에는 오후 2시 50분경에 도착하였다. 최대한 빨리 걸었다는 생각에 아침에 철로 길을 걸었을 때 걸린 시간보다 많이 단축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과 달리 확실히 몸이 지쳤었는지 시간을 계산해보니 오히려 아침 대비 10분이 늘어난 2시간 10분이 소요되었었다. 


대기소 안에서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 컨디션도 그렇고 하산 시 기상 여건도 좋지는 않았지만, 8시간 반이 넘는 대장정을 무사히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이다, 고생했다라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고, 저 멀리 있는 조몬스기에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보았다.


대기소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 아라카와야 등산로 입구에서 야쿠스키 시젠칸으로 가는 오후 첫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 거기서 다시 미야노우라로 향하는 버스를 갈아타고 나서 총 1시간이 조금 넘는 이동 끝에, 마침내 빗속을 뚫고 무사히 숙소에 복귀하였다. 


방에 복귀하니 오늘 야쿠시마를 떠난다던 인도계 미국인 남자와 네덜란드 여자는 이미 체크아웃을 한 후라 볼 수 없었고, 다른 누군가가 오늘 새로 체크인을 했는지 못 보던 짐 가지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들에게 굿바이 인사를 하지 못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여행 일정 상 어쩔 수 없었던지라 모두 즐겁고 안전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며 속으로 인사를 보내보았다.


비에 젖은 옷과 가방을 정리해놓고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방에 돌아오니, 아까 그 짐의 주인이 방에 앉아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한 후 각자 여행기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이름을 물어보았다. 프랑스에서 온 가브리엘이라는 2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어제 네덜란드 여자처럼 2주 간의 휴가 동안 일본 여기저기를 여행 중이라고 하였다. 이 친구도 여행 스타일이 즉흥적이었는데, 구체적인 여행 계획 없이 Lonely Planet 책자 하나만 갖고 도쿄로 입국해서 책을 보면서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때그때 일정을 짜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어제도 느꼈던 거지만 그러한 여행 스타일이 특이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야쿠시마는 책자에 소개된 야쿠시마 원시림이 갑자기 보고 싶어 오사카에서 넘어왔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계획했던 대로 여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예상할 수 있지만, 현지에서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면, 계획을 짰다면 짯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계획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무계획 여행만의 매력도 충분히 있겠구나, 나도 앞으로 다른 여행 방식을 취해보는 것도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마침 저녁시간이기도 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 나, 가브리엘에게 같이 나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도 좋다고 하여 아직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어 호스텔 가까운 곳에 있는 야끼토리 집으로 가보았다. 

가볍게 꼬치와 튀김에 맥주를 마시면서, 내일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간다는 그에게 야쿠시마 '선배'로써 관련 정보와 경험담에 대해 얘기도 해주고, 그와 내가 일본 여행을 하면서 느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마지막에는 아직 한국 방문 경험 없는 그에게 한국도 좋으니 다음에 한 번 와보라고 하고 그때 나한테 연락을 달라는 당부도 하였다. 


호스텔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황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8시간이 넘는 산행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피곤한 것도 있었고, 거기다가 맥주까지 한잔해서 그런지 갑자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내일은 야쿠시마 해안을 자전거로 일주하는 일정인데, 내일 컨디션을 위해서라도 일찌감치 자두는 것이 좋을 거 같아 바로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다.

자기 전에 오늘 경험한 야쿠시마 대자연의 위대함과 조몬스기의 신비로움을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같았고, 물론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긴 하지만, 내일은 오늘과 달리 새벽에 시간 맞춰 일어날 일도 없어 왠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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