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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Oct 07.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26

신비의 섬, 야쿠시마에 입성하다

2019.4.13 (토)


새벽 6시, 누가 깨우지도,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어제 장거리 라이딩으로 피로가 쌓였는지 기지개를 폈을 때 몸이 여기저기 쑤시긴 했지만, 잠을 오래 깊게 자서 그런지 오히려 정신이 맑고 기분도 상쾌하였다.

오늘 타네가시마에서 야쿠시마로 출발하는 페리 시간은 오전 9시 40분이다. 페리 터미널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 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컨디션 관리 차, 좀 더 눈을 붙여볼까 했으나 이미 잠에서 깨서 그런지 다시 자려니 잠도 잘 안 오고 그렇다고 마냥 누워있는 것보다 차라리 아침 운동 겸 호텔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자전거를 갖고 밖으로 나섰다.  


호텔 앞 항구를 기점으로 오른편에 위치한 동네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구름이 조금 끼긴 했지만 오늘도 역시 날이 맑고 화창하였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느껴져는 적절한 짠 내음이 기분을 좋게 하였다. 

항구 옆 도로를 타고 쭉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위치한 주택가를 끼고 다시 항구 쪽으로 돌아왔다. 항구 내 가지런히 정박돼 있는 선박이며, 주택가 내 깨끗하고 주차되어 있는 차량 하나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동네 골목길을 보며, 역시 일본이구나를 이 곳에서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짐을 싼 후, 8시 반 경에 체크아웃을 하고 페리 터미널로 향하였다. 터미널에 도착해 어제와 동일한 곳에서 다시 자전거 분해 패킹 작업을 한 후 대합실 안으로 이동하였다. 9시 10분쯤 되니 가고시마에서 출발해 이 곳에 도착한 페리에서 사람들이 내려 터미널 쪽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어제 이 시간대에 저들처럼 타네가시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반대로 비슷한 시간대에 이 곳을 다시 떠난다고 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얼마 후 야쿠시마행 승선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선착장으로 이동해 페리에 탑승하였고, 출발한다는 방송과 함께 페리가 엔진 소리를 뿜어내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하루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생에 남을만한 강렬한 추억을 선사해 준 타네가시마. 그 타네가시마를 뒤로 한 채, 이제는 새로운 행선지이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야쿠시마를 향해 힘찬 출발을 하는 순간이었다.   


니시누모테항을 빠져나온 페리는 경쾌하게 바다를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니시누모테에서 야쿠시마 미야노우라까지 거리는 뱃길로 약 50km라 출발한 지 얼마 안돼 창 밖 너머로 야쿠시마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높게 우뚝 솟아 있는 웅장한 모습이 낮고 일자로 쭉 늘어져 있었던 타네가시마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야쿠시마는 수령 3,000년이 넘은 삼나무와 야생 사슴, 원숭이를 만나볼 수 있는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문명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신비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 거 같아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함에 기대가 한층 고조되었다.  


니시노무테에서 출발한 지 약 50분이 지난 후에, 마침내 야쿠시마 미야노우라에 도착하였다. 페리에서 내려 선착장을 지나 자전거를 조립할 수 있는 터미널 건물 주변 공터로 이동하였다. 아무래도 야쿠시마가 타네가시마보단 인기 관광지라 그런지, 터미널 주변에는 이 곳에 이제 막 들어온 사람들과 이 곳을 곧 떠나는 사람들이 한 데 섞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전거 조립 및 짐 정리를 마치고, 야쿠시마에서 3박 4일 간 묵을 숙소인 야쿠시마 유스호스텔(屋久島ユースホステル)로 이동하였다. 미야노우라항에서 보이는 해안에서부터 가파르게 솟은 산세며 기괴스러울 정도로 입체적인 숲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구름도 짙게 껴서 그런지, 존재만으로도 기존 세계와는 뭔가 다른 새로운 세계에 온 거 같은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숙소는 미야노우라항 바로 주변에 위치해있어 터미널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숙소에 도착하였다. 유스호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시설 이용 방법 및 준수 사항 등에 대해 듣고 배정받은 방으로 이동하였다. 2층 침대가 두 개 있는 4인실이었는데, 한창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시간대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놓여있는 짐 가지를 봤을 때 2명이 이 방에 묵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에 짐을 풀어두고, 주변 맛집이나 슈퍼마켓 같은 정보를 여쭤보기 위해 프론트로 가보았다. 한두 번 응대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사장님께서는 이미 투숙객 전용으로 만들어 놓으신 주변 정보가 담겨있는 지도를 건네주시면서 친절히 설명을 해주셨고, 참고하라고 렌터카 업체와 버스 운행 시간표 같은 교통 정보도 같이 건네주셨다. 미야노우라에서 주변으로 이동하는 버스 운행 시간표 경우, 야쿠시마 도착 전까지 인터넷 상에서 최신 정보 확인이 어려워 현지에 도착하면 비지터 센터에 가서 버스 정보부터 확인해야지 했는데, 숙소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 싶었다.  

버스 운행 시간표를 보니, 조몬스기 산행을 위해서는 우선 야쿠스기 시젠칸으로 가야 하는데, 미야노우라에서 야쿠스니 시젠칸으로 출발하는 버스는 새벽 4시 46분에 출발하는 버스 딱 한 대 뿐이었다. 내일 조몬스기 산행을 할 계획인데, '새벽 4시 46분 버스를 타려면 도대체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오늘 일정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라타니운스이쿄로 향하는 버스는 하루에 총 4대가 있었다. 조몬스기 산행에 앞서 시라타니운스이쿄를 먼저 가볍게 둘러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오후 1시 6분에 이곳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미야노우라 주변을 둘러보고 점심 식사를 하고 나면 버스 출발 시간과도 얼추 맞겠다 싶어, 오늘은 시라타니운스이쿄를 갔다 오는 것으로 하고, 간단한 등산 장비를 챙긴 후 숙소를 나섰다. 


먼저 오늘 내일 산행에 필요한 보급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장님께서 알려주신 미야노우라 항 주변에 있는 '라이프 센터 야쿠덴'이라는 슈퍼마켓으로 이동하였다. 아무래도 섬 지역이라 그런지 본토보단 물가가 조금 비싸긴 했지만, 주변에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많지 않은 거 같아, 물, 에너지 젤, 초코바, 빵 등을 여유 있게 구매하였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오니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하였다. 호스텔에서 받은 지도를 살펴보며 어디로 갈까 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야쿠시마 관광센터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뭘 주문할지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신기한 메뉴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돈까스 모양의 사진에 '야쿠시마 사슴고기 상차림'이라고 쓰여있는 메뉴였다. 야쿠시마에 야생 사슴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 사슴을 이용한 요리인가, 사슴 고기를 돈까스처럼 만들면 어떤 맛일까라는 호기심과 궁금함에 주저 없이 사슴고기 요리를 주문하였다. (야쿠시마에 가면 날치 튀김은 꼭 먹어봐야 한다는 얘기는 익히 들은 적이 있어 메뉴에 있는 날치 튀김도 먹어 보고 싶었으나, 왠지 저녁때 술안주로 좀 더 적합한 거 같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주문한 '사슴까스'가 나왔다. 튀김옷 아래 검은색의 고기가 눈에 뜨였는데, 사슴이니깐 냄새가 나거나 질기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냄새도 없고 예상외에 식감이 너무 부드러워 사슴 고기라는 걸 몰랐더라면 질 좋은 소고기로 착각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 일본인들의 주변 식자재 활용 및 퀄러티 관리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계획에 없던 '사슴까스'로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를 마친 후 건물 밖을 나섰다. 


시라타니운스이쿄 행 버스가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있어, 정류장 주변에 있는 공원과 항구를 둘러보았다.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와 느림의 미학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후 1시 6분, 정확한 시간에 시라타니운스이쿄 행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버스는 미야노우라 시가지를 통과한 후 미야노우라 강을 만나자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야노우라 강을 보니 야쿠시마는 매일 비가 올 정도로 강수량이 많다고 하던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섬에 있는 강 치고는 강폭이 넓고 유량도 매우 많아 보였다. 


북상하던 버스는 강을 건넌 후 얼마 안 있어 본격적으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냥 언덕길을 올라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산의 높이나 가파른 경사도가 예사롭지 않았고, 주변 숲의 모습도 마치 3D 안경을 끼고 보는 거처럼 입체적으로 느껴져, 점점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거 같았다.  

버스가 거의 산 꼭대기쯤까지 왔을 때는 산 아래 저 멀리 미야노우라 항까지 볼 수 있었다.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연신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장관이었다.  


약 10km 정도 되는 가파른 언덕길을 30여분 정도 달린 끝에, 마침내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시라타니운스이쿄에 도착하였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아무래도 버스 운행 편이 적은 곳이다 보니 돌아가는 버스 시간부터 확인을 해보았다. 마지막 버스는 오후 4시 10분으로 내가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약 2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걸어내려가지 않는 이상 4시 10분 버스를 놓치면 내려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잘 봐가면서 둘러보다가 4시까지는 돌아와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로 향하였다. 

이동하면서 버스 운행 편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야노우라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로 올라온 버스는 약 15분 정도 정차했다가 이 곳에서 손님을 태워 다시 내려가는 구조였다. 만약 내가 미야노우라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버스인 오후 3시 31분 버스를 타고 이 곳에 왔더라면 올라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바로 다시 마지막 버스를 타고 내려가야 했던 것이었다. 하마터면 일정이 꼬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2시간 반 밖에 안된다고 불만 가득했던 마음은 금세 그나마 다행이네로 바뀌게 되었다.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려고 서 있는데, 앞에 계신 버스 기사님이 매표소 직원분에게 방금 버스에서 내린 승객 수 정보를 전달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 기사님이 왜 인원수를 세는지 의아했었는데, 버스 승하차 인원 수나 티켓 구매자 수 같은 등산객 출입 현황을 대조할 수 있는 정보 보고 및 공유를 통해, 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혹시 모를 사건 사고에 미리 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우리도 평소 사건 사고가 많은 국립공원에서 벤치마킹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입장권을 구매한 후, 시라타니운스이쿄 등산을 시작하였다. 예전에 원령공주를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잘 표현한 영상미에 눈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었던 곳을 직접 걷고 있다고 하니 뭔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잠시 멈춰서 주변을 쓱 둘러봤을 때, 나무와 돌에 결착된 이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이 주는 아우라와 위엄이 실로 대단하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이런 '푸르스름'이 주는 오묘함과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품으로까지 승화한 것일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처음 만난 고목은 높이 약 26m에 둘레가 8m인 수령 3,000년이 넘는 야요이스기였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카메라 앵글 안에 나무 전체를 한 번에 담기가 어려웠는데, 땅에서 나서 자랐다기 보단 오히려 하늘에서 떨어져 박혔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와 주변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성스러운 생김새에 한 동안 넋을 놓고 계속 위아래로 쳐다보게 되었다.  

3,000년이 넘는 나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가능할까, 정말 자연은 위대하고 신성한 존재이구나 하다가, 그렇다면 야쿠시마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조몬스기는 7,200년이 넘었다는데 조몬스기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라고 생각해보니, 조몬스기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내일 있을 산행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레기 시작하였다. 


야요기스기를 감상한 후, 다시 등산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3천 년 거목의 임팩트가 워낙 컸었는지, 주변의 나무들도 분명 야쿠시마에서 나고 자란 지 오래된 신비스러운 나무들이었지만, 천년이 안된 나무들은 왠지 아직 갈 길이 먼 애기 나무들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니, 사쯔끼 구름다리가 나왔다. 지도를 보니 구름다리를 지나 쭉 따라가면 구구리스기(원령공주의 출입문으로 사용된 나무), 시라타니산장, 다이코이와 바위로 가는 길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위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니다이오스기가 있어,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니다이오스기를 먼저 보고 내려오기로 하였다.  


입구에서 사쯔끼 구름다리까지가 경사가 거의 없는 트랙킹 길이라면 여기부터는 경사가 있는 본격적인 산행길이었다. 경사가 있어 오르는 내내 헉헉대긴 했지만, 헉헉대는 속에서 맑은 공기를 한 껏 마셔서인지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고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얼마 안 있어, '나무다운 나무' 니다이오스기와 마주하였다. 1대(부모)와 2대(자식)가 한 나무에 산다고 해서 니다이오스기라고 불린다는데, 야요이스기보다 둘레는 작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높아, 다시 한번 자연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니다이오스기를 둘러보고 다시 사쓰끼 구름다리로 내려왔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50분이었다. 지도 상에 구름다리에서 구구리스기까지는 약 900m라고 되어있었는데, 시간이 살짝 촉박할 거 같긴 해도 이왕 온 김에 다이코이와 바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구구리스기까지는 보고 가고 싶었다. 조금 속도를 내서 움직이면 4시 전까지 입구로 다시 돌아가는 데는 문제없을 거 같아, 아까보다는 빠른 발걸음으로 공격적인 산행을 시작하였다.  

언덕을 하나 넘어 다음 언덕을 향해 헉헉대며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물방울 같은 게 뚝뚝 떨어졌다. 뭔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니 먹구름이 급격히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게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였다. 먼 거리가 아니라 그냥 무시하고 갔다 올까 순간 망설였으나, 오늘이 야쿠시마에서 마지막도 아니고 어차피 내일 새벽부터 종일 등산을 할 건데 굳이 날씨를 거스르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아쉽지만 구구리스기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다시 구름다리 쪽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사쓰끼 구름다리에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았고, 물이 흐를 때 나는 소리도 경쾌해 보고 듣고 있는 것만으로 심신이 절로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15분여 정도 걸어 내려와 입구에 도착하였다. 도착했을 때는 3시 20분 정도였는데, 입구에는 산행을 마치고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많이 남았지만, 그래서 구구리스기를 못 다녀온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지긴 했지만, 대기소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다기 보단, 오히려 주변 숲도 보고 그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구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멈춰있는 게 불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멈춰있을 때 비로소 보인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도 느낄 수 있었다.  


4시 10분 마지막 버스를 타고 다시 미야노우라로 향하였다. 내려갈 때도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아까보다 좀 더 어둑해진 것도 있고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신비스러움을 경험한 후라 그런지 산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넘어 위대함과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거 같았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 미야노우라에 도착하였다. 아직 시간이 조금 이르긴 했지만, 숙소에서 잠시 쉬면서 내일 등산 준비도 미리 해놓을 겸, 바로 유스호스텔로 향하기로 하였다. 


숙소 방에 들어가니, 체크인 때 보지 못했던 같은 방 투숙객 2명이 있었다. (서로 이름 공유는 안 해서 이름은 모르겠으나) 가볍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각자 본인의 현재 진행 중인 여행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본인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소개한 인도계 미국인 남자는 전 세계를 돌고 있는 중인데, 한 곳에 오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보고 싶은 지역에 3~4일 정도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일과 여행을 병행하고 있으며, 야쿠시마에 오기 전에는 오사카에 있었고 여기 다음에는 서울로 간다고 하였다. 말로만 듣던 진정한 디지털 노마드를 만나니 신기하였다. 

다른 한 명은 네덜란드에서 온 여자인데, 3주 간의 휴가 동안 일본 전역을 여행 중이라고 하였다. 3주 간의 휴가를 일본에서 보낸다는 유럽인을 보고, 과연 유럽인들 중에 3주 간의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라고 생각해보니 유럽인들 인식 속 일본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고, 우리도 유럽 나아가 세계 각국에서 방문하고 여행하고 싶은 나라로 좀 더 성장했으면 하는 바램도 같이 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여행담에서 조금 특이했던 건 여행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일 일정은 내일 생각하는 식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개인의 취향이라 단정 짓긴 어렵지만, 유럽인들의 여행하는 행태나 관점이 우리와는 뭔가 다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이들 모두 야쿠시마에 온 지 오늘이 2일 차였는데, 둘 다 내일이면 야쿠시마를 떠난다고 하였다. 호스텔을 예약하면서, 같이 등산할 수 있는 메이트를 만났으면 하는 혹시나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못내 아쉬웠었다.  

 

서로 앉아서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6시가 훌쩍 넘었다. 인도계 미국인 남자가 (네덜란드 여성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우리 모두에게 본인이 오늘 낮에 미야노우라 시가지를 둘러봤는데 물건이 엄청 싼 슈퍼마켓을 찾았다고 안내해 줄 테니 같이 갈 생각 있냐고 하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까 내가 간 곳이 아니어서 같이 가겠다고 하고, 나간 김에 저녁도 먹고 오자고 해서 좋다고 한 후, 다 같이 나갈 채비를 해서 숙소를 나섰다.  


시라타니운스이쿄 행 버스 루트와 동일한 길을 따라 미야노우라 시가지를 지난 후 미야노우라 강을 건넜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아직 비가 오고 있는지 산 꼭대기는 거묵한 구름들로 자욱했지만, 이 곳에서 보는 저녁노을은 군데군데 구름이 있긴 해도 옅은 파스텔톤 물감을 뿌려놓은 듯 정말 아름다웠고, 저녁노을 아래 자리 잡은 마을과 주변 풍광도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한적하고 평온한 시골 마을의 한 장면 같았다.  


그가 안내한 곳은 A-Coop이라고 하는 슈퍼마켓이었다. 숙소에서 거리는 더 멀긴 해도 낮에 방문했던 라이프 센터 야쿠덴보다는 물건 종류도 더 많았고 가격도 좀 더 저렴하였다. 각자 마켓을 둘러보면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였다. 나는 야쿠시마 유명 소주인 미타케(三岳)가 작은 플라스틱 병으로 괜찮은 가격에 판매하길래, 귀국 시 지인 선물용으로 몇 개를 구매하였다. 


슈퍼마켓을 나와 저녁 식사로 뭘 먹을까 서로 얘기하다가, 인도계 미국인이 누가 인도인 아니랄까 봐 일본식 카레가 어떠냐고 하였다. (날치 튀김이나 생선회 같이 야쿠시마에서 먹어야 할 게 많은데) 네덜란드 여자가 좋다고 해서 나도 대세에 밀려 동의를 하였고, 시가지 주변에 있는 구로스(グロース)라는 카레집으로 이동하였다. 

야쿠시마에 왔으니 미타케 소주를 우선 기본으로 주문하고, 나는 카레카츠를 식사로 주문하였다. 카레 자체를 오랜만에 먹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날치 튀김의 존재를 잠시 잊게 만들 만큼 카레 맛이 꽤 수준급이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방으로 복귀를 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그 둘은 뭔가 이대로 오늘 밤을 마감하기에는 아쉬웠는지, 나가서 한 잔 더 할 건데 같이 나갈 생각이 있는지 나한테 물어보았다.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한잔하면서 야쿠시마에서의 밤을 즐기고 싶었으나,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얼른 짐을 챙겨놓고 씻고 자는 편이 나을 거 같아 아쉽지만 사양을 하였다. 


짐을 싸놓고 씻고 나와 누우려는데 아직 9시가 채 안됐다. 누워서 오늘 하루 전체 일과를 돌이켜보았다. 아침에 타네가시마에 있었다는 사실을 순간 까먹었을 정도로, 타네가시마에서의 아침, 타네가시마에서 야쿠시마로의 이동, 짧았지만 시라타니운스이쿄 산행, 그리고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까지 하루가 정신없이 순식 간에 지나간 거 같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지만, 오늘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느꼈던 감흥과 내일 마주할 조몬스기에 대한 기대감을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며, 깊은 잠에 들게 해달라고 주문을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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