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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Oct 06.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25

조총과 로켓의 고장, 타네가시마를 가로지르다

2019.4.12 (금)


새벽 5시, '못 일어나면 끝이다'라는 긴장감을 안고 자서 그런지,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안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려고 해서 그런지 몸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씻고 나왔을 때 몸이 개운한 게 다행히 컨디션이 나쁘진 않았다. 


타네가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라이딩을 할 계획이라 라이딩 복장을 갖춰 입은 후, 자전거와 함께 타네가시마로 가져갈 짐이 담긴 백팩은 어깨에 짊어 메고, 가고시마에 남겨둘 짐이 담긴 캐리어는 손으로 이끌며 방문을 나섰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오늘 일정을 마치고 왠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와야 할 거 같은데 지금 이 순간이 여기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 간 정이 들었는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 한 달 동안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호텔 방에 감사의 표시로 가벼운 목례를 한 후, 호텔 1층 로비로 내려가 체크아웃을 하고 직원분에게 캐리어를 맡긴 후 건물 밖으로 나섰다. '이제는 타네가시마와 야쿠시마만 남았구나'라는 생각에 뭔가 홀가분하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새로운 여정을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페리 체크인 전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도 있고 터미널까지 거리도 1km가 채 안돼 자전거로 천천히 이동하기로 하였다. 아직 오전 6시라 그런지 항상 차나 사람으로 북적이던 시내 대로가 텅 비어 있어 뭔가 낯설었는데,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만큼 오늘의 노고가 헛되지 않고 훗날 나의 성장에 필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게 오늘도 화이팅해보자며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넣어보았다.


페리 터미널에는 6시 15분쯤 도착하였다. 자전거를 페리에 실으려면 기차에 탑승할 때와 마찬가지로 분해 패킹을 해야 하는데, 이제는 여러 번 해봐서 숙달됐다고 도착하자마자 터미널 내에서 신속하게 분해 패킹을 마치고 체크인 대기를 기다렸다. 

6시 반부터 체크인이라고 해서 바로 탑승 절차가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실제 탑승은 출발 10분 전인 7시 20분쯤부터 진행되었다. 물론 출발 전에 아슬하게 오는 것보다 여유 있게 일찍 와서 기다리는 편이 낫긴 하지만, 내가 이들이 말하는 '체크인' 개념을 잘못 이해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럴 거면 체크인 시간을 언급하지 말던가 그럼 차라리 잠이라도 더 자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언제 탑승하나 하고 마냥 기다렸던 게 뭔가 억울하게 느껴졌다. 


탑승 안내방송에 따라 선착장으로 이동해서 '로케또(Rocket)'라는 이름의 페리에 탑승하였다. 첫 뱃편이라 탑승객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타네가시마로 출장(혹은 출근) 가는 것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들이 꽤 많이 탑승하였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돼 출발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페리가 선착장을 빠져나와 한 바퀴 선회를 한 후, 힘찬 엔진 소리와 함께 타네가시마를 향해 출발하였다. 

비록 가고시마 한 달 살기라는 여정 중 일부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익숙한 곳을 벗어나 다시 낯선 곳으로 향한다고 하니, 가고시마로 처음 향했을 때 느꼈던 긴장감과 설렘이 온몸을 감싸 왔다. 

이번 여정도 잘 마무리해보자며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을 하면서 창 밖을 보았는데, 멀리 듬직하게 솟아있는 사쿠라지마도 늘 그랬듯 가고시마는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무사히 잘 다녀오라고 배웅해주는 거 같아, 그러겠노라고 나도 인사를 하였다.  


로케또라는 이름에 걸맞게 페리의 이동 속도는 어마어마하였다. 눈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왼쪽 편의 오스미 반도의 해안과 산맥 라인을 보고 있으니 카노야로 라이딩했을 때의 기억이, 반대쪽 사쓰마 반도 쪽을 보고 있으니 지란으로 라이딩했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페리 터미널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대략 70km이니 페리의 시속은 약 70km/h임), 일본 본토 최남단인 사타 곶(佐多岬) 보였다. 최초에 카노야 라이딩 계획을 짤 때 오스미 반도 해안을 따라 사타 곶까지 내려가 볼까도 했으나, 당일치기로 다녀오긴 거리가 너무 멀고 주변에 숙박시설도 마땅치 않아 일정에서 제외를 했었는데, 막상 사타 곶의 모습을 직접 보니 그리고 사타 곶에서 봤을 바다 경관을 상상해보니, 그때 무리를 좀 해서라도 갔다 올 걸 그랬나라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여행에는 '기한의 제약'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지, '만약'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거 같았다. 

사타 곶(佐多岬)을 지난 지 얼마 안 있어 저 멀리 길게 펼쳐져 있는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구글맵에서 위치를 확인해보니 타네가시마였다. 오스미 반도나 사쓰마 반도와 같은 '본토' 모습과는 달리, 뾰족하게 솟은 산 하나 없이 낮게 일자로 쭉 늘어져 있는 산 능선의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저곳이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는 '조총'이 유래됐다는 곳이구나, 그리고 지금은 일본 최첨단 과학 기술이 집합해있는 '우주센터'가 있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에, 왠지 저 멀리 보이는 타네가시마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뭔가 비장해졌다. 


타네가시마 해안이 보인 후 얼마 안 있어, 가고시마를 출발한 지 1시간 반 정도 지난 오전 9시경에 페리는 타네가시마 북부에 위치한 니시누모테(西之表) 항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페리에서 내려 자전거와 배낭을 지고 터미널 건물 주변 공터로 이동하여 자전거를 조립한 후 나머지 짐 가지를 재정비하였다. 가고시마 보다 위도가 낮아서 그런지 공기가 살짝 후덥지근했으나, 날씨도 맑고 바람도 적정히 불어 오늘 라이딩하기에는 최고의 날씨가 될 거 같았다. 


이동 준비를 마친 후, 먼저 오늘 묵을 숙소인 아라키 호텔(あらきホテル)로 가서 체크인 시간 전에 짐을 맡겨 놓기로 하였다. 호텔은 페리 터미널에서 1km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170년이 넘은 호텔이라고 해서 건물 외관이나 실내에서 특유의 일본스러운 혹은 타네가시마만의 고풍스러움을 기대했는데, 최근에 보수 공사를 했는지 외관은 그렇다 쳐도 실내가 말끔한 신식이라 뭔가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호텔 창업주 집안 소유로 대대로 내려온 거처럼 보이는 로비에 장식된 오래된 조총과 포들을 통해서나마 이곳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프런트 직원 분에게 여권을 보여주면서 체크인 전에 미리 짐을 맡겨도 되는지 여쭤본 후 라이딩에 불필요한 큰 배낭 가방 보관을 부탁드렸다. 언제쯤 체크인 예정인지 여쭤보시길래, 낮은 아닐 거 같고 아마 저녁이나 밤이 될 거 같다는 말을 건넨 후 호텔 건물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타네가시마의 상징인 '조총'과 '로켓'에 관련된 곳을 자전거로 둘러보고 돌아올 예정이다. 먼저 호텔 주변에 있는 뎃포칸(조총) 박물관을 둘러본 후 본격적인 라이딩에 들어갈 건데, 이 곳 니시누모테에서 섬의 남쪽으로 약 50km 정도 이동해 포르투갈인에 의해 조총이 처음 전래되었다는 가도쿠라 곶을 구경한 후, 거기서 동쪽으로 약 10km 정도 이동해 일본 최첨단 과학 기술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우주 센터를 둘러보고, 다시 북쪽으로 50km를 달려 니시누모테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니시누모테로 돌아오는 경로에 위치한 지쿠라노이와야라는 해식 동굴도 잠깐 둘러볼 계획이다.


자전거로 타네가시마를 북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는 총거리가 110km가 넘는 여정이다 보니 오늘 일정의 대부분을 라이딩에 할애해야 했는데, 관광을 한다는 면에서는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라 시간 소모적일 수도 있겠지만, 이 곳이 '타네가시마'라는 점에서 봤을 때는 헉헉대며 장시간 라이딩하는 것도 여러모로 의미가 클 거 같아 무언가를 많이 보고 적게 보는 것에는 큰 의의를 두진 않기로 하였다. 우선, 우리에게는 쓰라린 역사인 임진왜란이 발발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조총의 전래지이자 우리가 앞으로 따라잡고 넘어서야 할 최첨단 과학기술의 중심지인 이 곳의 남북을 가로지르면서, 예전에는 우리가 부족해서 당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물론 보는 사람도 없겠지만 혹시 타네가시마에 '조총의 신'이나 '로켓의 신'이 있다면, 한국인의 투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겪었던 과거 역사와 지금도 여전히 앞서 있는 일본 로켓 기술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곱씹어보고 싶었으며, 나아가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온전히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인생 계획에 대해서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고, 마지막으로 오늘 라이딩에서 얻게 될 성취감과 자신감을 앞으로의 인생에서 부딪힐 수 있는 지치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원동력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와 기타 장비들을 점검한 후, 니시누모테 시가지를 거쳐 뎃포칸 박물관을 이동하였다. 본토에서 떨어진 섬이라 혹시나 했는데, 건물은 노후돼도 깨끗하게 잘 정비된 시가지를 보고 역시 일본답구나 싶었고, 지역 경제 활성화의 핵심인 관광 육성을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뎃포칸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주변에 자전거를 주차한 후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오늘 라이딩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쓰진 않고 어떤 것들이 전시되어 있나 가볍게 둘러보기로 하였다.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유래된 조총부터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의 총포뿐만 아니라 메이지 시대 무라타 소총까지 시대 별로 일본에서 제작된 혹은 외국에서 들여온 다양한 종류의 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자국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뽐내는 자랑으로 여겨지겠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땐 그것들로 인해 임진왜란 혹은 일제 강점기 때 고통받았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자기의 안위는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과거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총을 보고 나오니 갑자기 전투력이 상승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박물관에서 조총을 보고 나왔으니, 이제는 조총이 처음 전래되었다는 가도쿠라 곶을 향해 본격적인 라이딩을 할 차례였다. 

본격적인 라이딩 시작에 앞서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보급을 한 후, 상승된 전투력과 충전된 당을 바탕으로 힘찬 페달링과 함께 타네가시마에서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58번 국도를 타고 니시누모테 외곽의 주거 지역을 지난 지 얼마 안 있어 도로는 해안으로 접어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 빛깔 바다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가시거리도 좋아 저 멀리 바다 너머 오늘 아침에 지나 온 오스미 반도와 내일 아침에 갈 야쿠시마 모습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오늘 라이딩 거리가 꽤 있어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니시누모테로 돌아오려면 속도감 있게 라이딩을 해야 한다고 의식했던 것도 있고, 마침 바람도 등 뒤에서 불어 준 덕분에 평소보다 빠르고 편하게 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니시누모테에서 25km를 달려 출발한 지 약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타네가시마 섬 중간에 위치한 나카타네(中種子)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나카타네에는 '초속 5센티미터'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었던 고등학교가 있다고 본 적이 있어, 우선 그 학교를 보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배경이 된 곳은 타네가시마 중앙고등학교라는 곳인데, 사실 그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어 '이 곳이 애니메이션에 나왔었다는 그곳이구나'하고 별다른 감흥 없이 학교 정문 주변만 가볍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겁쟁이 페달'이라는 일본 자전거 애니메이션을 보고 거기에서 실제 배경이 된 코스를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경우를 떠올려봤을 때, '초속 5센티미터' 팬이라면 이 곳은 그들에게 방문해보고 싶은 '성지'일 것이고 이 곳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타네가시마에 충분히 올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상상이 아닌 일본 내 실제 존재하는 곳을 배경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력과 잘 만든 컨텐츠 하나가 지역 경제 활성화에 미칠 수 있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 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 정문 앞 자판기에서 구매한 물과 캔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라이딩에 돌입하였다.   


나카타네에서부터는 내륙 지역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 길을 반복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섬 지형과 달리 주변에 솟아있는 산이나 언덕이 없이 사방이 틔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변 지형의 막힘이 없어서 그런지 해안에서 바람이 '후웅'하고 한 번 불어올 때의 세기가 어마어마했는데, 멀쩡히 잘 가던 자전거가 바람에 휘청거려 넘어질 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타네가시마 주업이 어업뿐만 아니라 고구마, 사탕수수 재배와 같은 농업도 비중이 크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바람을 타고 맴도는 주변 농작지의 흙과 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카타네에서 30여분 정도 달렸다. 도로 사거리에 대형 로켓 모형물이 서 있길래 가까이 가서 보니 미나미타네(南種子) 행정구역임을 나타내는 모형물이었다. 모형물에는 '역사와 문화와 과학의 마을, 미나미타네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가도쿠라 곶과 우주센터 모두 행정구역 상으로 미나미타네 소속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형물 아래에서 잠시 목을 축인 후, 다시 58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였고, 3~4km 정도 더 달린 끝에 미나미타네 중심지에 도착하였다. 건물은 노후되었지만, 도로 주변으로 있는 건물들의 수를 봤을 때 이 곳이 나카타네보다는 큰 동네이지 않을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미나미타네 중심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쯤이었다. 살짝 허기지기도 하고 마침 주변에 패밀리마트 편의점도 있어, 간단하게 먹을 것과 보급품 등을 구매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잠시 정차했다 가기로 하였다. 편의점 내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으면서, 구글맵에서 가도쿠라 곶까지의 경로와 거리를 살펴보았다. 가도쿠라 곶까지는 약 10km, 늦어도 1시간 내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편의점에서 나와 가도쿠라 곶을 향해 다시 힘찬 페달링을 시작하였다. 미나미타네 중심지를 벗어나서는 국도가 아닌 지방도를 타고 쭉 내려갔다. 도로가에 우거진 나무와 숲들로 주변 경관을 볼 순 없었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주변 분위기에서 곧 머지않아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나미타네를 출발한 지 20여분 정도 지난 후, 달리는 도로 반대 끝 부분에서 기다렸던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바다를 보니 이제 가도쿠라 곶에 거의 다 왔구나라는 생각에 힘을 얻어 좀 더 속도를 내서 달렸고, 10여분 정도 더 달려서 마침내 조총의 유래지 가도쿠라 곶 입구에 도착하였다.


입구 주변에 자전거를 주차한 후 가도쿠라 곶 안쪽으로 향하였다. 조총을 든 군인 동상이 서 있는 입구를 지나 안쪽에 있는 조총 전래 기념비와 당시 이 곳에 도착했던 배 모양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둘러보고, 아래쪽으로 좀 더 내려가 바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신사 도리이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푸른 바다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끝 없이 펼쳐져 있는 수평선을 경계로 공간을 이분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고, 바다와 함께 왼편으로 길게 뻗어 있는 해안선과 오른편 저 너머 보이는 야쿠시마를 바라보고 있는 거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생각에 잠기기 충분하였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당시 중국으로 가다 이 곳에 표착한 포르투갈인을 태운 배, 그가 소개한 조총, 그리고 그 조총의 위력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제조법을 배우고 직접 생산해 조총으로 기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본, 나아가 그 조총을 중심의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란 전쟁 하에 조선에 미쳤던 영향 등 일련의 역사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역사에서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만약 당시 배가 표류하지 않고 중국으로 잘 갔더라면 혹은 표착한 곳이 타네가시마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어땠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도공들의 유출도 없었고, 나아가 우리가 더 먼저 근대화에 성공해 일제 강점기도 없었고, 지금의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을까라는 가정에 가정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그 당시 조총이 전래되지 않았더라면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로 인한 후속 역사도 충분히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부국강병 보단 중화사상과 유교사상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당시 조선의 상황과 반대로 무력 증강과 해외 진출에 사활을 걸었던 당시 일본의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조총이 없었더라도 왜란은 시기의 문제지 전쟁은 언젠가는 일어났을 것이고 그로 인한 이후의 역사는 오늘날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분하긴 하지만 이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앞서 나갈 수 있는 '이길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그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있게 그 안에서의 국민 개개인의 역할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과거 역사의 성공 혹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후대에는 임진왜란과 강점기에 이어 이번에도 또 일본에 당했냐가 아닌, 그때는 당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드디어 우리 이전 세대들이 뭔가 제대로 보여줬구나 하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지금의 이 생각들을 잊지 않고 항상 명심해야겠다는 굳은 다짐도 같이 하게 되었다.  


조총이라는 '과거 첨단 기술'의 전래지인 가도쿠라 곶을 봤으니, 이제는 로켓이라는 '현재 첨단 기술'의 집합지인 타네가시마 우주 센터로 향할 차례였다. 가도쿠라를 뒤로한 채 자전거에 몸을 싣고 우주 센터를 향해 힘찬 출발 하였다. 

75번 현도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같은 섬인데 섬의 남부라고 북부나 중부와는 달리 도로 주변에 보이는 식물들에서 아열대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10km 정도 달려 먼저 도착한 곳은 우주 센터 내에 위치한 우주과학 박물관이었다. 평소 로켓이나 우주 과학 쪽은 관심도가 낮고 잘 모르는 분야라, 가고시마에 오기 전에 일본의 우주 과학 기술 경쟁력이 얼마나 되는지 검색을 해봤었는데, 우리가 아직 자체 로켓 발사 기술을 개발 중인 반면, 일본은 로켓 제조부터 발사까지 이미 독자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국제 우주정거장에 보급선을 보내고 토킹 할 수 있는 기술까지 갖출 만큼 미국과 러시아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우주기술 강국이었다.  

그런 우리와의 기술 격차를 알고 봐서 그런지, 관내에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크기의 로켓 모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앞서 있는 우주과학 기술 수준이 느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괜히 압도되고 위축되는 기분 마저 들었다. 


박물관 안을 둘러보진 않고, 여기서 2~3km 정도 떨어져 있는 로켓 발사대를 볼 수 있다는 로켓 언덕 전망소(ロケットの丘展望所)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거리는 짧았지만 예상치 못한 오르막에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헉헉대며 이동하는 동안 일본 우주 과학 기술 발전 과정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지금은 일본이 미국이나 러시아와 어깨를 견줄만한 수준이 되었지만, 일본의 우주 개발 역사는 그들보다 20~30년이나 늦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주강국 일본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기초를 중시하고, 시간과 돈이 많이 들더라도 기술을 자립화한다라는 계획 하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했던 그들의 시스템과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로켓 언덕 전망소에 도착하였다.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로켓 발사대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의 우리는 급격하게 경제 성장을 이룬 과거의 성공 DNA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는 기초와 기본 분야를 중시 여기지 않았던 예전의 풍조가 아직도 사회적으로나 개개인적으로도 만연해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우주 강국이 되기 위해 걸어온 길을 보면서 우리도 선진국 나아가 초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당장의 성과가 없더라도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을 갖고 기초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고, 사람들 또한 그것을 중시 여기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형성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본과 우리의 우주 기술 격차는 약 50년 정도라고 하는데, 일본이 미국과 러시아를 따라잡아 세계 최고의 우주 기술을 확보한 거처럼, 우리도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은 거처럼, 우주 기술 분야에서도 일본을 따라잡고 우주 강국의 일원으로 거듭나 우주정거장에서 태극기를 볼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같이 해보았다.  


타네가시마의 상징인 조총과 로켓 관련된 곳을 모두 둘러봤으니 이제 다시 니시노모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3시 반, 여기서 니시노모테까지는 약 45km 정도이니 곧장 달린다면 해지기 전에는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활용해 가는 길에 타네가시마의 유일한 해식동굴인 지쿠라노이와야 동굴을 잠깐 구경하고 가기로 하였다.  


로켓언덕 전망소에서 약 10km 정도 달렸다. 지쿠라노이와야 동굴이 있는 하마다 해수욕장 이정표가 보여, 메인 도로에서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다 쪽을 향해 1~2km 정도 더 이동해서 하마다 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타네가시마의 동쪽 해안은 태평양에서부터 바로 밀려와 파도가 높고 거칠다고 하던데, 시간대 상 썰물인지 물이 잔잔한 게 바다가 마치 고여있는 호수처럼 느껴졌다. 

하마다 해변 백사장을 지나 동굴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썰물 대가 맞는지 밖에서 동굴 안쪽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 안 공간 규모도 꽤 크고,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안에서 바라보는 주변 섬들과 한 데 어우러져 있는 바다 뷰가 멋있었다. 동굴 안이라 땀이 금세 식었는지 살짝 오싹하기도 하고, 썰물 대인 거 같긴 하나 언제 갑자기 물이 들어찰지 몰라 오래 있진 않고 다시 동굴 밖을 나왔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니시누모테를 향해 달릴 시간이었다. 히자만 지금까지 누적 거리도 있고 몸도 식었는지 슬슬 온몸에 피로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75번 현도를 따라 쭉 올라가서 나카타네까지 간 후, 거기서부터는 오전에 왔던 길을 타고 돌아가는 코스라 우선은 나카타네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하고 힘을 내보았다.

나카타네까지 거리는 10km 정도였는데, 가는 동안 중간중간 오르막도 많고 힘도 많이 빠져있던 터라, 나름 빨리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정도 걸려 오후 5시 반쯤에 나카타네에 도착하였다.


메인 도로 주변에 보이는 자판기 앞에 잠시 정차해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눈 밑이 살짝 묵직한 게 온몸에 피로가 쌓인 듯 한 느낌이었다. 니시누모테까지는 남은 거리는 약 25km. 시원한 물과 에너지 젤로 보급을 하고 다시 한번 기합을 불어넣은 후, 오늘 코스의 마지막인 나카타네-니시누모테 구간에 돌입하였다. 


해안 평지 도로라 바다를 감상하면서 조금은 편하고 여유 있게 갈 수 있겠구나 했던 나의 예상은 '맞바람'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아까 나카타네로 향할 때 나의 날개가 되어주었던 바람이 이제는 장벽이 되어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거센 바람 때문에 앞으로 페달링 하는 거 조차 힘들어 자전거를 멈춰 세워야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오늘 이 곳이 '타네가시마'라는 점을 계속 상기하며,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짜내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니시누모테에 거의 다다렀을 무렵, 수평선 아래로 곧 들어갈 거 같은 붉은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 잠깐 멈춰 섰다. 공교롭게도 오전에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겨 가는 도중에 멈춰 섰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저 멀리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8시간 만에 다시 이 곳으로의 귀환이라니, 아직 호텔까지 좀 더 남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해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조총과 로켓의 고장인 타네가시마를 내 두 다리로 가로지르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생각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나아가 지금보다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거나 나은 국민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어서,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라이딩이 될 거 같았다.  


호텔까지 무사 도착을 위한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고, 20여분 정도 더 달린 끝에 마침내 니시누무테 아라키 호텔에 도착하였다. 아침 9시 반부터 저녁 7시까지 약 9시간 반에 걸친 117km의 대장정이 무사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체크인 시 방 키와 함께 호텔 옆에 위치한 아카오기(赤尾木の湯)라는 온천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티켓도 같이 받았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자마자 옷만 갈아 입고 바로 온천으로 이동하였다. 

온천은 동네 센토보다는 시설 면에서 한 단계 위였다. 몸이 고되긴 했는지 탕에 들어가자마자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몸이 스르륵 녹았는데,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느껴져 그 기분이 좋았다. 


너무 오래 탕에 있으면 몸이 퍼질 거 같아, 가볍게 탕을 즐기고 나온 후 곧장 호텔 직원에게 추천을 받은 일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거리에 불빛이 환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섬 지역이라 그런지 아직 저녁 9시도 안됐는데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 라이딩 후에 빠질 수 없는 생맥주와 '타네가시마 어성특선'이라는 정식 메뉴를 주문하였다. 오늘의 노고에 대해 화답을 하듯 맛있는 음식과 술을 배부르게 먹고 가게를 나왔다.  


무사히 오늘 일정을 잘 마쳤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기분이 좋아 가볍게 한 잔 더 하고 싶었으나, 갈 만한 술집도 찾아보기 어렵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있을 야쿠시마 일정을 생각해 아쉽지만 바로 호텔 방으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방에 들어오니 밤 10시였다. 내일 있을 야쿠시마에서의 또다른 여정은 어떨지 부푼 기대를 안은 채 단잠을 청하면서, 타네가시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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