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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Apr 13. 2023

나의 꿈은 상추 부자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1

2023년 02월 02일


 반복되고 지루한 회사생활. 그날도 평소처럼 8시 30분에 맞추어 출근을 하고, 노트북을 켜고,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텀블러에 커피 한 잔을 따르고, 신발을 크록스로 갈아 신은 뒤, 외투 주머니에 챙겨 온 아침밥인 고구마를 꺼내고, 끄트머리만 잘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자리에 앉아 개인 메일함을 열었다.


 개인 메일함에는 매일 대여섯 개의 메일들이 도착해 있다. 동종업계 모니터링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구독신청을 해놓았다. 업무시작 전 그 메일들을 대충 훑고, 바로 삭제를 한다. 구독 취소를 하기엔 게으르나, 메일함에 메일이 쌓이는 게 싫어 매일 삭제를 하는 모순적인 성실함이 만든 아침 루틴이다. 


 서울시청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난 서울시청을 구독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뭐, 왔으니 일단 클릭은 한다. 그러다 눈에 띈 한 줄, [동행서울 친환경농장 가꾸기]. 설렜다. 포실포실 흙을 만지는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충동이 일어났다. 바로 공공예약서비스에 가입을 하고, 가장 가까운 농장을 찾고, 예약금을 넣었다. 짝지에게는 논의를 하는 척했지만, 사실 채팅을 보낸 그 순간 나는 이미 결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그마한 밭을 가졌다. 이제 남은 건 상추부자가 되는 것뿐! 





2023년 04월 09일


 드디어 텃밭이 개장했다. 준비는 단 하나도 안되어있다. 사전에 결제하면 소농기구를 신청할 수 있다기에, 구성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청은 해두었다. 상추모종과 씨앗 몇 개를 준다고 하기에 '충분하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농장으로 갔다. 이틀 전 비가 내려 땅은 적당하게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늘막용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이름을 체크하고, 상추모종 28분과 씨앗 4종, 작은 도구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받고 배정받은 텃밭으로 갔다. 밭 앞에 자신 있게 딱! 섰다. 그리고, 그러나, 막막했다.


(좌) 8천원 소농기구 세트 (우) 상추모종 28분


 일단, 돌을 골랐다. 짝지와 각각 괭이와 모종삽을 들고 냅다 흙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돌을 골라내고, 다시 흙을 다졌다. 햇빛 아래 쪼그려 땅을 긁어내고 있으니, 머리가 핑 돌았다. 저질체력이 금세 들통났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멀게 들려오는 각자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대화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얼마 남지 않은 벚꽃잎, 점점 차오르는 내 숨소리, 괭이가 흙을 긁어내고 돌에 부딪히는 느낌.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상추 모종을 심어보자 싶었다. 모종이 담긴 판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으니, 윗 텃밭의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처음 해보는 거면 본인을 따라 하라며, 시범을 보이시고는 물조리개도 빌려주셨다. 누가 봐도 서툰 짝지와 내가 신경 쓰이시는지, 본인 밭을 가꾸시다 수시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응답을 하고 싶은 욕심에 상추를 금덩이 다루듯 옮겨 심었다. 


 평소였으면 나는 아마 아주머니가 말을 건 그 순간부터 이미 표정이 굳거나 썩어있었을 거다. 웬 참견이지, 알아서 할 건데,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나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내가 식물에 손을 대면 잔소리부터 시작하는 엄마가 떠올랐고, 엄마가 보고 싶었고, 엄마를 느꼈다. 엄마를 여기에 모셔올 수는 없으니, 아주머니에게라도 칭찬을 받고 싶었나 보다.


텃밭 No.229_나의 첫 상추


 알고 보니 아주머니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상추를 다 심어갈 때 즈음, 본인이 직접 구매해 온 것이라며 파 모종을 들고 옆으로 오셨다. 파 모종을 어디서 구입했고, 얼마였고, 그래서 본인이 얼마어치를 사셨고, 지금 이만큼 심었고, 20개 정도가 남았다며 긴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그러고는, "쑥갓 씨앗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뿌려서 키우면 딱 완벽할 거 같은데, 남은 건 파 모종뿐이라서..." 하며 말 끝을 흐리고 먼 산을 쳐다보셨다. 아, 또 우리 엄마다! 본인의 욕구와 요청이 명확히 드러나지만, 절대 본인 입으로는 이야기하지 않고, 딴 곳을 쳐다보며 정답을 내가 말하게 하는, 전형적인 우리 엄마의 대화스킬!


 웃음이 나왔다. 아주머니가 사랑스러웠다. 엄마에게 장난치듯, 달려가 껴안으며 장난치고 싶었다. 이미 알고 오셨겠지, 서울시에서 무료로 나누어준 씨앗세트 안에 쑥갓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저희는 쑥갓은커녕 아무런 욕심이 없으니 괜찮다며 씨앗을 건넸지만, 아주머니는 한사코 남은 파 모종을 밀어주고 '교환'이라며 뿌듯하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정말 쑥갓 씨앗을 '아주 조금만' 사용하고는 돌려주셨다.


텃밭 No.229_나의 첫 대파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작물은 대파가 되었다. 남겨주신 파 모종이 생각보다 많아서, 꽤 많이 심었다. 한창 파를 심고 있으니, 본인은 이제 집에 간다며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파는 그냥 둬도 쑥쑥 자라니 손해보지 않을 거라며, 다시 한번 쑥갓 씨앗과의 물물교환의 타당성을 강조하셨다. 사실 내가 받은 게 더 많은데 말이다. 짧은 순간 또 한 번 행복을 느꼈다. 아주머니는 물을 많이 줘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 계셨고, 짝지는 이미 파김치를 담그겠다며 원대한 꿈을 펼치고 있었으며, 아주머니와 짝지 사이의 나는 행복했다. 


 남은 땅에는 서울시에서 받은 기초씨앗 4종을 대충 뿌리고 왔다. 쑥갓, 열무, 아욱, 시금치. 자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씨앗의 생명력과 땅의 힘을 믿으며 물이나 잔뜩 뿌려주었다. 




 생각보다 밭이 넓어 1/5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빈 땅으로 두고 돌아왔다. 뭘 심을지는 여전히 정하지 못했다. 농사와 수확이 목적이 아니라, 흙을 만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욕심이 가는 작물이 없다. 무엇이 심겨도 상관없을 것 같다. 짝지는 집에서 키우고 있는 도토리나무를 심어보자고 한다. 아마 친환경 농장에 도토리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도토리가 더 좋은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니. 


 일단은 상추를 심었으니, 첫 번째 목표는 상추부자로 정했다. 무럭무럭 키워서 풍성하게 자라면, 한 잎씩 따다가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야지. 상추 그 뭐라고, 사 먹으면 되지 싶지만, 내 마음이 담긴 상추니까 특별한 것이라고 억지 주문을 걸고, 나눔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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