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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Apr 26. 2023

약 60일 뒤 점심메뉴
:생바질 가득 오일 파스타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8

2023년 4월 16일



 지난주 첫 파종을 하고, 1/5 정도의 땅이 남았다. 뭘 심어야 할지 고민하며 이런저런 씨앗을 찾아보다 문득 '씨앗이 제대로 크기는 하려나-'는 생각이 들어, 모종을 사다 심는 걸로 생각을 바꿨다. 다행히 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양한 모종을 파는 농원이 있다길래 눈 뜨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모종 종류가 많았다. 사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모종들 이름을 봐도 그 채소가 무슨 채소인지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가장 먼저 발길이 간 곳은 당근 앞. 뭔가 그립감 있는 그럴듯한 수확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예전에 사무실에서 씨앗부터 키워본 적이 있어 이유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한 뭉텅이 크게 챙기려 손을 뻗었는데, 그제야 나는 당근을 먹지 않는 편식쟁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잘 키워도 결국 짝지 입에 억지로 욱여넣기나 하겠지.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손맛이나 볼 용도로 한 줄만 챙겼다.


모종이 줄줄이 / 생각보다 저렴한 것들도 있고, 생각보다 비싼 아이들도 있다.


이것저것 조금씩 담다 보니 그새 만원이 넘었다. 모자라진 않을까 하다가도 욕심부리지 말자 싶어 그만하고 밭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사고 나서 보니 또 너무 조금씩 샀나 싶다. 흑방울토마토 나무 하나, 페퍼민트 하나, 바질 하나, 로메인 4종, 당근 6개, 또 다른 로메인 6개. 차에서 내리고 보니 토마토는 어디 나눠주긴 글렀다 싶었다. 풍년이 나도 한 소쿠리도 못 채울 것 같은 게, 아무래도 다음에 몇 개 더 사 와야 할 듯싶다.


첫 모종 구매, 이것저것 조금씩 담아놓으니 소꿉장난 같다.


 지난주 평일 서울에 봄비가 꽤 왔었는데, 여기도 비가 오긴 했던 것 같다. 지난주 열심히 골라두었던 흙들은 이리저리 다 뒤섞여 있고, 흙이 씻겨 내려간 건지 아니면 돌이 날아온 건지 밭 위에 돌멩이가 가득했다. 일단 오늘 데려온 아이들을 심으려면 돌멩이들은 치우고, 흙은 평평하게 다져야 할 것 같다. 다시, 시작이다.

 지난주 씨앗을 뿌렸던 자리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비가 와서 씨앗까지 씻겨 내려간 건지, 아니면 아직 싹이 나지 않은 건지, 알 길이 없다. 일주일 만에 새싹을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하면서도 내심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초보 농사꾼에게 일주일은 너무 길다.

 서울시에서 무료로 나누어준 상추 모종들은 파릇파릇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다 땅에 붙었다. 비를 너무 세게 내리 맞은 건지, 힘이 하나도 없고 축 쳐져있다. 지난주 짝지가 힘조절을 실패하고 뿌리를 뽑는 건지 심는 건지 헷갈리게 심어졌던 상추는 겉잎의 절반 이상이 다 떨어져 나가 있다. 이번주를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반면 옆 밭에서 나눔 받았던 파들은 아주 튼튼하다. 파릇파릇 꼿꼿하게 잘 서있고 심지어 조금 자라 있었다. 회사 맞은편 자리의 직장동료가 밭농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를 강력하게 추천했던 게 떠올랐다. 심어만 놓으면 무적이라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 한번 돌렸다 보면 또 자라 있는 게 파라며. 정말인 건지 아니면 이 아이들만 유난히 잘 심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종류라도 무사한걸 보니 기뻤다. 

텃밭 No.229_풀이 죽은 상추 / 텃밭 No.229_아무일 없다는 듯 꼿꼿한 파

 

 언제 또로 비가 올지 모르니, 오늘 모종들은 아주 튼튼히 그리고 단단히 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땅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번엔 아주 작은 돌멩이까지 걸러내고, 뭉쳐있는 흙은 모종삽으로 부셔서 뿌렸다. 허브는 크게 나무처럼 키워놓고 종종 따다가 먹을 거니까 간격을 넓게 심고, 나머지는 상추처럼 한 줄 간격을 나란히 맞춰 심었다. 그런데, 심고 보니 땅이 또 남는다. 왜 모종이 넉넉하다고 생각했을까. 남은 땅은 1/5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1/4 정도였나 보다. 없는 걸 억지로 심을 순 없으니 또 빈 땅을 놀려놓고 뒷정리를 했다.

로메인 상추에 삼겹살을 싸 먹을 생각에 이미 설레는 사람, 손길이 불순하다.




 두 번째 꿈은 바질 파스타로 정했다. 케냐에 잠시 살 적에 바질나무를 구해서 엄청 열심히 키웠다. 작은 화분으로 시작해서 허벅지 높이까지 올 만큼 키웠는데, 한 번을 수확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너무 소중히 키운지라 뜯어먹을 용기를 내지도 못했고, 잘 키워주십사 다른 파견직 직원분께 양도를 하고 왔었다. 그리고 출장이 잦았던 직원분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질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조심스레 건너 건너 전해왔다. 그 뒤로 바질은 아픈 손가락이다. 내가 널 다시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리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그런데 바질의 삶은 어떤 게 행복한 걸까? 잘 길러져서 잘 먹힐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일까? 아니면 그렇게 무럭무럭 끝도 모르고 자라다가, 클 만큼 다 크고 난 뒤에 다음 씨앗을 퍼트리고 죽는 게 행복한 삶일까? 모르겠다. 바질은 40cm까지 자란다고 한다. 이 밭에서 그만큼 커다랗게 무럭무럭 자라서, 반은 나의 파스타를 위해 내어 주고, 반은 또 씨앗을 만들고, 그렇게 파릇파릇 살다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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