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대문 농린이 May 25. 2023

첫 수확의 기쁨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29

2023년 5월 7일


 

 이제는 모종가게 가는 길을 꽤 익혔다. 처음 모종가게에 갔던 날은 입구를 지나쳐 한 바퀴를 돌아갔었다. 네비를 따라가다 보면 갑작스럽게 입구가 나타나는데 뒤에 항상 차가 있으니 급정거를 할 수 없어 지나치고, 차를 돌려 다시 들어갔었다. 이제는 30미터 전부터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늦춘다. 이 짧고 작은 습관이 조금은 농부스러워진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아직도 조금 남은 땅을 채우려 이것저것 골랐다. 로메인 상추 4개, 비타민 5개, 깻잎 3개, 호박 2개. 호박은 밭의 끝에 심어야 줄기를 타고 나간다고 하던데, 어쩌다 보니 우리는 밭의 정 가운데 심는다. 나란히 두 개를 심었으니 하나는 오른쪽으로,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사이좋게 뻗어나가지 않을까-하는 하릴없는 기대를 해본다. 사실 나는 호박보다 호박잎이 목적이다. 

 대학교 재학시절 학교 앞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 있었는데, 그 골목들의 사이의 사이에 30년도 더 된 쌈밥집이 있었다. 술집들과는 매우 이질적인 공간이었는데, 밤에만 살아나는 그 골목에서 유일하게 낮에만 대문을 여는 가게였다. 사장님 부부는 그 가게 안에서 작은 텃밭을 키우시며 각종 쌈채소를 기르시고, 그 채소들을 그날마다 잘 자란 것들만 따다 고등어조림과 함께 상에 내어 놓으신다. 

 친구들이 인스타 감성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 나는 화요일마다 쉬는 엄마를 불러다 그 쌈밥집을 갔다. 낡은 찬기와 요즘과는 다르게 안쪽이 깊은 밥공기를 받고, 매일 바뀌는 쌈채소를 먹으며 공강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했다. 

 그 가게에서 엄마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쌈채소 중 하나가 호박잎이다. 약간은 쌉쌀하면서, 찜기에서 수분을 가득 머금어 보드라워진 호박잎에 흑미밥 한 숟갈과 양념간장 조금 얹어 한입에 넣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호박잎의 솜털이 까실거리는 느낌이 거슬리는 듯하면서도 식감을 살린다. 

 그 가게의 분위기가 맛있게 만들었던 건지, 정말 호박잎이 맛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첫 사회생활에, 갑작스러운 해외파견 등이 겹치며 호박잎을 먹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지금 먹어도 그 맛이 날까? 나의 호박들도 옆으로 덩굴을 뻗치고 넓은 잎을 내어줄 때쯤, 양념간장을 만들고, 찜기를 준비해 봐야겠다.


                     

 오늘은 서울시에서 친환경 웃거름(엔비올 트리플)을 배분해 줬다. 1 구획 당 1포(2kg)로, 가을에 한번 더 지급해준다고 한다. 처음 안내받을 때 친환경 농장이라 화학거름이나 살충제 등은 절대 사용을 못한다고 했는데, 친환경 웃거름은 괜찮은 듯하다. 엔비올 트리플은 우수한 '질소질구아노'를 다량함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질소질구 아니란 조류가 어류를 먹고 배설하여 응고 퇴적된 것이라고 한다. 즉, 물고기를 먹은 새의 굳은 새똥이다! 새똥이 비료로 좋은 줄은 처음 알았다.

 텃밭의 아이들도 비료 먹을 준비가 되었는지 꽤 많이 파릇파릇하다. 이파리도 꽤 많이 생겼고, 씨앗을 뿌린 곳에는 여전히 잡초인지 작물인지 구분 안 가는 아이들이 꽤 자라 있다. 제일 잘 자랄 거라고 기대했던 대파는 의외로 부진하다. 지난주부터 시들시들하던 대파모종들은 전부 죽은 듯하고, 살아남은 아이들도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웃거름이 대파에게도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대파에게 먼저 뿌려줬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욱, 시금치, 열무, 쑥갓

 씨앗을 뿌린 자리에 자란 아이들이 이제는 꽤 구분이 간다. (물론 여전히 몇몇은 잡초인지 작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열무는 생각보다 자기주장이 강하게 자라고 있어 확연히 눈에 띄었고, 시금치도 꽤나 마트에서 보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욱은 사실 방풍나물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아욱이라고 말해주셔서 아욱인걸 알았다. 방풍나물은 손가락 3개 모양으로 자란다고 한다. 분명 방풍나물도 심었는데, 방풍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쑥갓은 꽤나 잡초처럼 생겼다. 쑥갓인지 못 알아보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쑥갓도 많이 자랐네~"라는 사담 나누는 소리를 엿듣고 나서야 쑥갓인 줄 알았다.

 가장 우수한 발육을 보인건 단연 상추였다! 우리 밭뿐만이 아니라, 어딜 봐도 모든 상추들이 파릇파릇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그새 수확의 시기가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오늘도 모종을 옮겨 심을 생각만 하고 왔다가 수확할 생각을 하니 괜히 설렜다. 급하게 장갑을 벗고, 모종을 담아왔던 박스를 털었다. (TMI-회사에서 A4용지박스 뚜껑 부분을 챙겨 오면 모종받침대 혹은 트레이 등의 용도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꽃상추는 아직 잎이 작은 듯해서 청상추만 수확을 시작했다. 밭농사에 크게 흥미를 못 느끼던 짝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큰 손을 바들바들 떨며 조심스레 첫 잎을 따더니, 용기가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쭈그려 앉아 상추를 수확한다. 모종 하나에서 5~6개 정도가 먹을만한 크기로 자란 것 같다. 첫 잎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뿌리 쪽에 약간만 힘을 줘도 톡-하고 떨어져 나왔다.

 상추 수확을 시작하니 짝지는 이미 저녁반찬을 고민하느라 바쁘다. 집에 고기가 남아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며, 삼겹살이 좋을지 제육이 좋을지 고민이란다. 냉동실에 고기가 남아있다면 목살일 텐데, 목살로 제육을 해도 괜찮을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요리는 내가 하는 것 같은데, 나의 의사는 없이 그저 상추 먹을 생각에 신난 짝지가 사랑스럽다.

첫 수확, 첫 상추

 다 따고 모아보니 양이 꽤 된다. 둘이서 먹기에도 차고 넘친다. 다음 주면 꽃상추까지 꽤 자랄 듯한데, A4박스 뚜껑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것 같다. 무언가 챙겨봐야겠다. 상추를 다 따고 나서는 물을 잔뜩 주고 왔다. 잎들이 꽤 커진걸 보니 물도 많이 먹을 듯해서 물조리개로 물을 10번이나 날랐다. 무럭무럭 자라라!


설렌다, 수확의 날이 다가온다.

작가의 이전글 삐뚤한 방울토마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