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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May 31. 2023

열무수확, 그리고 첫 번째 꽃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38

2023년 5월 16일



 어젯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가 다되어갔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시곗바늘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둘 다 저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에, 간단히 요기라도 할까 싶어 산책 겸 편의점을 향했다. 호텔은 청계천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는데, 날이 선선하니 청계천을 따라 걷기에 딱 좋았다. 

 엄마는 내일 이 시간쯤이면 다시 부산일 거다.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일정에 그마저도 이동만 8시간을 잡아먹지만, 딸 하나 보겠다고 서울까지 올라와준 엄마가 고맙고 안쓰럽다. 편의점엔 마땅히 먹을 게 없었다. 잠자리가 바뀌면 잘 잠들지 못하는 엄마가 신경 쓰여 맥주나 한 잔 마시자고 졸랐다. 알코올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너는 맥주를 골라라, 나는 안주를 고르겠다며 엄마가 몸을 돌렸다.

 새로 나온 맥주가 있길래 두 캔을 들었다. 맛이 없어도 새로운 걸 맛보았다는 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주를 고르는 엄마가 뭔가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시들어가는 씨 없는 포도와 방울토마토를 작은 투명음료컵에 담아놓고는 7,000원이라 찍힌 것을 보고 있자니 심술이 솟는다. 역시나 내 심술이 솟기 전에 엄마 심술이 먼저 솟았다. 되었다며 맘에도 없는 것 같은 땅콩을 집어드는 엄마를 보니 또 다른 심술이 솟는다. 7,000원이 뭐가 대수라고, 싶어 서울물가는 원래 이렇다며 투명컵을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서울나들이가 긴 것도 아닌데 저녁 한 끼 제대로 못 먹여 보내는 게 내심 맘에 쓰여, 내일 무얼 할지 엄마에게 잔뜩 이야기를 했다.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고-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한참을 가만히 듣던 엄마는 난데없이 텃밭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주에는 다녀왔나?" 사실 주말에 일정이 있어 한 주 텃밭 방문을 미뤄둔 상태였다. 한 주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고 했더니 엄마는 텃밭 걱정이 가득이다. 상추도 떡잎을 떼줘야 하고, 열무도 많이 자랐을 테고, 날이 건조하니 물을 자주 줘야 하고-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내일 그럼 텃밭 갈래? 아침 일찍 다녀오면 뒤에 일정도 무리 없을 것 같은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는 텃밭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몇 시쯤 일어날 텐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남아있는 땅은 어느 정도 되는지, 모종시장을 먼저 들릴 것인지 등등. 츤데레 우리 엄마의 성격은 하나도 안 변한 듯하다, 그냥 처음부터 텃밭에 가고 싶다고 하시지. 그렇게, 엄마와 나의 서울 텃밭 나들이가 계획됐다.


텃밭 No.229_청상추와 꽃상추 , 무시무시한 열무군단

 데자뷔일까? 지난주 잔뜩 뜯어서 민둥산을 만들어놓았던 상추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파릇파릇 살아났다. 꽃상추들은 부케를 만들어도 손색없을 만큼 포실포실 자랐다. 상추뿐이 아니었다. 열무며, 시금치, 방풍나물, 아욱, 쑥갓, 모두 당장 수확을 해야 할 수준이었다. 밭에 오는 길, 엄마가 어느 정도 자랐냐는 질문에 "상추 조금? 비닐봉지 하나면 충분해"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오산이었다. 계획에 없던 수확이 주요 임무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팔을 걷으셨고, 차에 가서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오라 하시고는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갔다.

 막상 수확을 하려 앉으니, 어떻게 뜯는 건지 감도 안 왔다. '시장에 파는 시금치가 어떻게 포장되어 있었더라...? 뿌리... 만 잘라내면 될라나?' 추측형으로 수확을 시작한 나와 달리, 엄마는 거침이 없었다. 경상도의 바이브가 터지기 시작했다. 랩 하듯 순서를 반복적으로 읊어주셨다. 

 " 죽은 잎은 어차피 가서도 못 먹으니 바로바로 떼어서 버리고, 떡잎도 먹는 게 아니니 크다고 아까워하지 말고 벌레들 먹게 떼어서 버려 얀다. 상추는 잎만 뜯으면 다음 주에 또 자랄 테니까 큰 잎만 먼저 손가락으로 톡톡 따면 되고, 방풍나물이랑 아욱은 과도로 밑을 베어내면 바로 나물도 무치고 국도 끓이면 돼, 쑥갓은 너무 자라면 뻣뻣해지니까 지금 전부 다 따서 먹어버리고, 아욱은 작은애 들은 좀 더 뒀다가 다음 주에 한번 더 끊어다 먹으면 되겠다."

 엄마의 대사가 끝나니 밭의 반 정도는 수확이 끝나 있었다. 엄마 대사를 외우랴, 엄마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랴, 또 수확한 애들을 한편에 모으랴, 이렇게 열심히 밭일을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일했다. 경상도 바이브는 말 속도뿐만 아니라, 움직임에서도 여실 없이 드러났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급한 것도 아닌데, 우리 엄마는 이미 혼자 밭일의 절반을 끝내버렸다. 

 오늘 수확의 최고는 열무였다. 열무가 이렇게 잘 크는 아이들인지 몰랐다. 다행히 차 안에 비상용으로 넣어 다니던 대형 마트장바구니 2개가 있었는데, 그게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열무의 절반만 뽑았는데도, 장바구니가 가득 차서 넣을 곳이 없었다. 결국 나머지 열무 절반은 좀 더 키워 다음 주에 수확하기로 했다. 햇 열무라니! 뽑을 때부터 줄기가 연한 게 느껴졌고, 머릿속엔 열무요리를 뭘 해 먹어야 할 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일단 우리 집 냉장고 용량을 생각해서 나눔 할 곳부터 생각해야 한다.

 TMI.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이 율무인데, 우리 엄마는 율무를 그렇게 못 외워 한참을 '열무'라고 불렀다. 오늘 열무를 뽑는 기세를 보아하니, 율무를 못 외웠던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열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싶다. 열무 뽑는데 이리 열심히일 줄이야. 분명 나보다 팔이 물렁한데, 나보다 열무를 10배 정도 잘 뽑는다. 천하장사 열열무.


텃밭 No.229_위쪽부터 당근, 깻잎, 호박, 비타민, 페퍼민트, 바질

 다른 아이들도 아주 무럭무럭 조금씩 자라고 있다. 의외로 잘 클 줄 알았던 허브들은 발육이 더딘 듯하고, 원래 한국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잎이 넓어진다. 방울토마토에는 첫 번째 꽃들이 열렸다. 다음 달이면 토마토가 맺히려나? 이번에 꽃이 핀 건 흑방울토마토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처음부터 검은 토마토가 열릴지 기대된다. 두근두근.



 수확을 마무리하고, 뒷정리를 끝내고 나니 1시가 훌쩍 넘었다. 이대로 서울까지 돌아가면 너무 힘들 것 같아 근처 음식점을 찾았다. 경기도권이라 그런지 저렴하고 맛있는 한정식집이 가득했고, 엄마와 나의 입맛엔 취향저격이었다. 30년째 이어온다는 두부전문점에 가서 맑은 두부 정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땀을 닦고, 화장실에 가서 흙을 씻어내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가까이 살았더라면-하며 짧은 상상을 해본다. 오랜만에 엄마와 흘리는 땀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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