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XAXO Nov 01. 2020

청명홍

01, 홍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부서져라 안을 수 있나?


그러면 안 되지 않나?


사람은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




홍은 몽롱한 정신을 훑어 세우며 턱 끝을 간지럽히는 명의 짧은 머리카락들을 느끼고 있었다. 홍보다 살짝 작은 아이의 사과 같을 정수리. 제 것과 같은 한방샴푸의 향이 조금 우스워 몸에 힘이 들어가니 여실하게 느껴진다. 어깨와 팔뚝이 아려올 정도로 세게 휘감아 오는, 이 원인 모를 단단함의 정체란 무엇인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는 동안 쌓아올린 뭔가가 오늘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뭐가 상식인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상식과는 이미 살짝 거리가 먼 게 확실한 명과의 관계부터 해서, 이상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원래 사람이 사람을 안을 때 이렇게 온 관절과 근육에 공들여 힘을 주진 않을 텐데.




그러니까, 내가 부서지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다 명과 이러고 있게 되었는지, 홍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음, 그렇지. 아까 토했고,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내가 어떤 말을 했고, 명이 나를 빤히 보다가… 아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안되겠지. 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명은, 홍의 동거인의 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홍이 그와 동거를 시작하고 좀 지나서 명도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으니 홍의 동거인들 중 하나가 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 어느 날부터였을까. 명은 고 맹랑한 마음을 언제부터 품기 시작한 걸까. 그래도 좋을 것 같아서, 홍은 한번 비틀거렸다. 명은 우직하고 고집스럽게 홍을 받쳐 안았다.




*




“안녕하세요.”




홍은 이번 주 신상 옷들을 행거에 하나씩 걸고 있었다. 옷가게 직원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올, 그것도 직원이 미리 했어야 할듯한 인사말을 저리 멋쩍게 건넬 사람이라면 요즘에, 그 어린애뿐이지. 고개를 들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털어내며 슬쩍 시선을 피하는 학생이 보였다. 한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는 이삼일마다 와서 어정대고, 비슷비슷한 옷 한두벌씩을 사간다. 지척에 백화점이 있는데 굳이 우리 가게까지 온다고. 뭐, 알 반가? 팔기만 하면 그만이지. 홍은 지극히 매니저다운 업무정신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거 괜찮은데요.”


“입어보시겠어요? 안 그래도 손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제 스타일이요? 그렇죠, 제가 이런 것도 또 잘 어울리죠?”




실실 웃으며 서둘러 자켓을 벗던 학생이 악, 하며 어깨를 비튼다. 뭐가 급하다고, 홍은 피식 웃으며 자켓 한 쪽을 마저 벗겨주었다. 검정색 라이더 자켓, 그러고보니 이것도 우리 가게 거구나. 두어 주 전쯤 사갔나본데. 건네준 블레이저를 걸쳐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던 학생이 쓰고 있던 비니를 만지작거렸다.




“응, 그건 손님이 보기에도 좀 아니지? 벗어봐요.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성급하게 비니를 잡아빼니 학생의 머리가 죄다 헝크러졌다. 부랴부랴 한 손으로 이쪽저쪽 정리해보지만 달아오르는 귀를 숨기지 못한다. 이 애는 서글서글하니 붙임성이 좋지만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더라.




“나 좀 봐봐요.”




돌아보던 학생이 이내 꿀꺽 침을 삼켰다. 눌리고 뻗친 머리카락을 슥슥 넘겨준 뒤 단추를 잠그고 칼라 매무새를 만져주는 홍의 손길에 학생은 잔뜩 굳은 채로 하염없이 비니만 구기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마주친 눈에도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만지는 거 싫어하려나, 그럴 수도 있겠군. 여기까지 와닿은 생각에 홍은 손을 떼고 학생을 돌려세웠다. 선머슴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훨씬 말쑥해보인다. 혈색이 좋아 잘 몰랐는데, 얼굴이 하얀 편이다.




“괜찮다. 뭐 학교에서 발표 같은 거 할 때, 이렇게 멋있게 차려입고 가면 되겠네. 대학생이죠?”


“…네.”


“무슨 전공해요?”


“어…국제 비즈니스요.”


“비즈니스, 응, 잘 어울리네.”




옷 스타일 평가하듯 남의 전공에 잘 어울리니 마니 하는 소리까지 해버렸다. 오지랖이려니 싶어 슬쩍 본 학생의 얼굴이 왠지 심각해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따님 있으세요?”


“아니. 독신이라서.”




홍은 얼굴을 살짝 찌푸려보였다. 갔다 온 것도 아니고, 이 나이까지 홀로 고고하게. 주변에 잔소리 할만한 인물은 이미 싹 쳐낸지 오래였다. 일, 이따금 여행, 그리고 심심할 땐 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하고. 연례행사로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속 썩이는 누군가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홍을 보노라면 아차 싶은지 행복할 때도 있다며 변명을 중언부언 늘어놓던 친구들은, 할 말이 떨어지면 홍의 연애사로 화제거리를 옮기곤 했다. 저번에 그 남자를 붙잡았어야 한다느니, 이번 남자랑은 결혼할 생각이 드냐느니 하는 질문이 나오면 홍은 이제 어깨만 으쓱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모임이 쓸데없이 길어지기 일쑤이니. 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하고 싶기야 하지만 이상하게 남자가 먼저 떨어져나가더라, 물론 다음엔 노력해볼 것이다’ 정도의 간단한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 씨.”




뭔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홍은 학생을 올려다보았다. 그이 이름이 왜 저 입에서…? 학생은 찰나 흔들리던 동공에 초점을 뚜렷이 하며 뱉은 말을 끝맺었다. 목 안에서 구르다 나온 목소리는 낮게 깔리다 못해 떨리고 있었다.




“제가 그 사람 딸인데요.”




홍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사람 분명 이혼했다고 했고, 전처는 외국에 산댔고, 어린 딸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아니 딸이 둘이었단 말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던 홍은 이내 학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무 말 한 적 없다는 듯이, 학생은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빙글거리며 카운터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저 이거 입고 갈게요, 계산해주세요. “







태그

작가의 이전글 더 크기 전에 물을 엎질러보고 싶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