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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Aug 22. 2021

봄, 꽃샘: Week 3

인종차별

사려야 하는


어두운 밤에도,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걷더라도, 중성적 스타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제발 나한테 말 걸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그 행인이 꼭 내게 다가온다. 다른 누구에게 가는 일은 결코 없다. 반드시 그 길에서 유일하게 아시안 여성인 나를 먼저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남들 눈에 근육 많고 수염 난 남성의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상상까지 해본다. 평소에는 투명 망토를 걸치기라도 한 양 눈에 잘 안 보이는 존재인데도, 만만한 대상을 찾아 시비를 걸고 싶은 인간들의 레이더망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시안 여성은 제1의 타깃이 된다, 반항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니까.


제대로 반항할 수 없는 이유는 많다, 일단 총 맞기 싫다. 얻어맞는 것도 싫다. 해서 그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지나가곤 하는데, 운 나쁘면 뒤에서 별의별 욕을 다 듣는다. 혼자 다닐 때도 그렇지만 아시안 여성들 두셋이 다니면, 글쎄, 왠지 모르겠는데 어째 더 심한 것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열 받을 노릇이긴 하지만 비교적 점잖게(?) 헛소리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뜬금없이 너희들 여기 이 주의 스펠링은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다거나, 외국인이라 잘 모르는 모양이지 하며 마스크 음모론을 한참 설파하는 (물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미처 대응할 시간도 없이 툭 치거나 놀라게 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 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 꽥 소리를 지르고 낄낄대며 멀어지는 식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그런 일이 아주 잦지는 않지만 그 빈도수가 한 달에 한 번이 되었든 두세 달에 한 번이 되었든 간에 마음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나중에는 '아, 저 사람 인종 차별할 거 같아! 눈 마주치지 말아야지!' 하는 식으로 관상까지(?) 어렴풋이 볼 수 있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사는 하우스메이트도 비슷한 일들을 겪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런 사건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반면에 유럽에서 온 백인 하우스메이트는 우리가 왜 삼십 분,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트들에 걸어가 볼 생각을 안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운동도 되고 지리도 익힐 수 있고 풍경을 구경하기도 좋지 않겠냐는 거였다. 시선을 나누고서 그저 간단하게, '위험할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분명히 같은 마을에 살고 비슷한 사람들을 마주칠 텐데 이토록 겪는 게 다르다. 왜 여성에게 밤길이 무섭고 껄끄러운지 이해 못하는 남자들이 있듯이, 왜 몇십 분씩 걸어 다니는 게 유색 인종의 여성에게 위험한 일이 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 여성들도 어딘가에, 가끔은 내 주변에, 있다.


나아가야 하니까


그나마도 "괜찮아?" 하는 안부 겸 걱정이 담긴 인사를 많이 들었던 것은,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이후였다. 명백하게 아시안 여성에 대한 혐오 범죄였던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이 진술하듯이 이전부터도 숱하게 있었던 종류의 것들이지만 마침내 미국 사회에 작게나마 경종을 울렸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사람이 날 싫어할지 어떨지 신경을 쓰면서 다니기란 정말 고역이다. 피해망상이나 편집증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미 사회적인 현상인 데다가, '모두'가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특히 트럼프 대통령 이후로, 또 코로나 이후로 본인의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시안을 공격하고 모욕하는 영상을 공공연하게 올리는 게 심지어 피해자 측이 아니라 가해자 측일 때도 있었다. 현지 경찰들마저 (놀랍지는 않지만) 아시안 대상 범죄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하다.


당연히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걱정과 스트레스에는 분명한 맥락이, 그러기에 차고도 넘치는 이유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화 장관의 발언을 여기 빌려와야겠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상대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받지 않으면 공격이 되지 않는다. 즉, 이것은 명백한 혐오 발언을 들었을 때도 허허하고 웃어넘기는 호구가 되란 말이 아니라,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금 그거 무슨 뜻이지, 나는 어떻게 반응했어야 하지, 하면서 분노에 자신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쏟지 말라는 뜻이다.


외국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아시안으로, 여성으로만 특정지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테크니션이면 테크니션, 연구자면 연구자, 의사면 의사, 운동선수면 운동선수, 본인의 직업과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했다. 우리의 피부색 너머로 무한한 가능성을 보는 것, 그리고 그걸 증명해 내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영향력과 발언권을 쥐게 되었을 때에 부당한 압력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날까지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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