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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rriet Dec 18. 2018

어느 날 이사를 하다가

뜻밖의 자기발견.


고객님, 취미가 다양하시네요?

한참 짐을 싸던 그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네? 아..하하 그런가요


문 앞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그 질문을 곱씹었다. 취미가 다양하다니, 제가요? 정말요? 진심이세요? 마음속에 의문이 일었다. 나는 취미도 없고 재미없게 살고 있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2년 동안 착실하게 쌓인 짐 속에 내가 모르는 뭔가 있나 보다.

모니터가 없어서 장기간 봉인된 게임기, 뽁뽁이로 고이 감싸 놓은 카메라와 렌즈들, 책 사이로 굴러다니는 그림도구. 그리고 한쪽에 올려둔 드럼 연습 세트와 건프라까지.

뭐가 많이 스쳐가긴 했구나.



고객님, 책이 120권이라고 하셨는데 저 이렇게 보시면 이 상자 안에 열 권, 스무 권,... 대충 세어 봐도 바닥에만 40권이 넘고 이거 다 하면...(이렇게 말하는 그의 앞에는 상자 네 개가 쌓여있었고, 그 뒤엔 반절 정도 차 있는 책장이 있었다.)


200권이 넘는 책 더미 사이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책도 있었다. 음,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단 구경하는 걸 좋아하나 보다. 여행도 좋아하시나 봐요. 책꽂이에 있는 여행 서적들을 담으며 그가 말했다. 미리 포장해 둔 기념품들이 속삭였다. 잘 봐, 가끔 깜빡하는 거 같은데 이거 다 네가 좋아하는 거야.


7.5평 작은 방 하나에 이렇게 많은 내가 있을 줄이야. 옷장을 열면 꽃무늬를 좋아하는 내가 있고, 냉장고와 싱크대 하부장에는 종종 음식을 해 먹는 내가, 술을 홀짝이는 내가 있었다.




밤부터 아침까지 눈이 내렸던 날. 이사는 세 시간에 걸쳐서 마무리되었고 이사 업체는 초과된 짐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다. 내가 몰랐던 나는 분홍색 봉투에 쌓인 채 2주 정도 방 전체에 흩어져 있다가 가까스로 자기 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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