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약이 아니에요
쌍둥이가 6개월이 되었을 무렵, 육아 난이도가 초절정에 이르렀다. 최악의 시간은 밤이었다. 나의 밤의 일과는 대략 이러했다.
쌍둥이를 어렵게 재우고 육퇴를 하나 싶은 찰나에, 이앓이를 시작한 하늘이가 채 30분도 잠에 들지 못하고 깨어난다. 목청이 찢어져라 울고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흔들어도, 바운서에 태워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너무 울어서 흐르는 콧물 때문 힘든가 싶어서 콧물을 빼주고 손에 까까를 하나씩 쥐어준 뒤 슬금슬금 아기띠를 꺼낸다. 아기들의 지능이 얼만큼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기띠를 보고 나서야 울음을 멈추는 걸 보고는 도대체 넌 뭐야, 한숨 쉰다. 아기띠를 매고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토닥일 때, 또 들려오는 울음소리. 자다가 뒤집기를 시도한 하나다. 하나는 에너지의 팔 할을 뒤집는 데에 썼다. 틈만 나면 뒤집고 싶어서 끙끙 댄다. 뒤집을 줄은 아는데 되집을 줄 모른다. 되집기를 시도하다가 성에 차지 않아 울어버리곤 했는데 자면서도 이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자다가 뒤집기를 시도한 하나가 되집기를 못해 폭발해버렸다. 하늘이를 안은채 하나를 바로 눕히고 토닥이지만 달래지지 않는다. 결국 아기띠를 또 하나 꺼낸 후 두 개를 연결한다. 앞 뒤로 한 명씩. 미국에서 생산된 쌍둥이 아기띠다. 합쳐서 17kg를 안고 엎고 몸을 살랑살랑 흔든다.
그나마 빨리 잠든 하나를 내려놓고 하늘이와 잠씨름을 한다. 눈이 감길 듯 말 듯. 겨우 잠들었다 싶어서 내려놓으면 어김없이 울음 발사. 또다시 아기띠로 재우다가 내려놓기를 반복. 운이 좋으면 밤 12시에 육퇴, 운이 나쁘면 새벽 3시쯤 육퇴. 손목도 허리도 어깨도 너무 아픈데 마음은 더 그러했다. 단 한순간도 나를 위해 쓸 시간이 없어서 화가 났다. 아이가 자면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쇼핑도 하고 싶은데 그런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내일의 육아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없어 대부분 남편에게 화를 냈고 두 번 정도는 애꿎은 아기띠를 바닥에 퍽퍽 내려쳤다. 도대체 왜! 울부짖으며 아기띠를 내리치는 나를 보며 놀란 하늘이가 나보다 더 크게 울었다.
낮이라고 별반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잘 자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구강기 아이는 입으로 사물을 탐색하기 때문에 자주 갖고 노는 장난감을 소독했다. 기저귀도 주문하고 육아에 필요한 물품들도 주문했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공부도 했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있다면 도대체 왜 하늘이가 잠에 들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책을 읽고 유튜브 강의를 듣고 인터넷을 헤매었다.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는데 나는 단톡방에서 화젯거리가 된 핫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도, 그즈음 대두된 차기 대선후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몇명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지 못한 노동현장에서 죽어가는지, 태풍이 내 고향을 얼마만큼 강타했는지 몰랐다. 매일 가던 아이스크림집 옆에 살던 길고양이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단골 김밥집이 언제부터 휴업이었는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이 세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일상이 고립이다. 더 최악은, 육아의 끝이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쌍둥이맘 카페에 내 처지를 한탄하는 글을 올리면 올라오는 답글의 팔 할. 시간이 약이에요. 도대체 약이 되는 그 시간은 언제 오는 걸까?
나는 몰랐다. 육아가 이런 것일 줄은. SNS에는 아가들 예쁜 모습만 올라오길래 마냥 예쁠 줄만 알았다. 낳고 키우다 보면 알아서 자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의 아이는 빨리 자라는 것 같은데 내 아이는 언제쯤 커서 혼자 빠진 쪽쪽이를 찾아 물고 스스로 잠에 들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만 엄마의 뼈를 갈아 넣는 것인 줄 알았는데 양육은 더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이유가 단지 쌍둥이를 키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나는 그 많은 책을 왜 읽었을까. 영어공부는 왜 했으며 뺀질거리며 세계여행은 왜 다녔을까. 잠자지 않고 우는 하늘이를 달래기에 무용지물인 것들.
육아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 내가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