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내는 사람 Apr 04. 2024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심판자

 대개 심판이라 함은 어떤 문제와 관련된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잘잘못을 가려 판단 또는 판결을 내리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 법의 심판을 받을 일은 흔치 않겠지만 지은 죄가 없더라도 일단 심판을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맞게 살았다 해서 사회규범 앞에 당당할 순 없다. 본인이 옳다고 믿고 추구했던 이념이 근본부터 틀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매 순간 옳고 그름을 판단받아야 한다면 얼마나 두렵고 숨이 막힐까. 다행스럽게도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우리가 법의 심판을 받을 경우는 적다. 대부분의 갈등은 사사로운 시시비비로 해결하곤 한다. 하지만 법적 영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 하여 그 결과에 초연할 수 있을까? 그 심판자가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나보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근엄하게 나의 죄를 묻는 것 같아 두려움을 넘어 공포심까지 느끼게 된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심판자는 당연히 아이들이다.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듯 피해자에겐 가해자가 있다. 내가 피해자일 땐 그저 억울하기만 했는데 가해자가 되어보니 더욱더 억울하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상대를 해하려는 게 아니라 위하려 한 건데... 이래서 세상에 온갖 핑계와 변명이라는 것이 생겨났나 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입장 차이'가 있다. 성격, 성별, 연령차 보다 훨씬 강력한 입장 차.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가족 내에서 대부분의 가해자는 부모다. 해를 끼쳤다고 해서 고의나 악의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피해 호소인이 있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다. 자신의 무죄를 해명할 수 있으나 인정받기는 어렵다. 손 닿지 않는 선반에 하루하루 먼지가 쌓이듯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심판받아야 할 건수들도 늘어간다는 현실이 감당하기 벅차다.

 

 내가 부모에게 받았던 부당함을 자식에게 전하지 않았다 해서 아이가 부당함을 모른 채 자라나는 건 아니었다. 거기에는 내가 미처 생각 못 했던 다른 차원의 부당함이 있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 내가 그랬듯 아이들도 나를 심판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쯤 되니 지난날 내가 너무 가혹한 심판자는 아니었나 부모님께 죄송해진다.


 피해자는 심판자가 될 수 없다. 법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자식을 둔 부모는 꼼작 없이 가해자가 되고 매 순간 피해자인 자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계가 심히 불공정하게 느껴진다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이 사정을 알면서도 부모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나만 당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덜 억울해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