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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 사람 Apr 04. 2024

쪽지가 맺어준 사랑

3분에 읽는 초단편 반전 소설

 "박정민 씨!"

 퇴근길 잠실역 계단, 오고 가는 빽빽한 인파 속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방비 상태이던 그의 손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 확인하려 고개를 숙이느라 정민은 잠시 휘청한다. 사람에 밀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나서야 손에 쥐어진 쪽지를 발견했다.

 '뭐지, 이건?'

 주위를 둘러봐도 수많은 이들 중에 누가 준건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계단을 마저 올라와 쪽지를 확인하던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빠, 저 서진이에요. 길 건너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혹시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셔도 돼요. 오빠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6개월 전 갑자기 행방을 감췄던 그녀가 어느 날 불쑥 정체 모를 누군가를 통해 쪽지를 건넨 것이다. 맞은편 건물을 보니 2층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있는 여인이 서진을 닮은 것 같다.

 '내가 잘못 본 건가?'

 1초의 망설임 없이 정민은 찻길을 건너 녀에게 달려간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그의 모습 뒤로 자동차 경적 소리와 놀란 사람들의 무수한 눈빛이 묻혔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사라지지 않을까 다급하던 정민의 염려와 달리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밝게 웃으면서.

 "서진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어디서 뭘 한 건데? 그렇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법이 어딨 어!"

 정민의 입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만나줘서 고마워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두리뭉실 대답을 회피하던 서진이 불안한 듯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오빠, 혹시 그동안 여자친구가 생겼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처음엔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했고,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네 마음이 변해서 떠난 거라 생각했어. 그 배신감이 너무 커서 누구도 새로 만날 수 없었지. "

 정민은 그동안의 원망과 설움이 복받쳐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서진은 안심이 된 듯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다.

 "오빠, 사실 그땐 오빠에 대한 확신이 없었거든요? 근데 막상 오빠 곁을 떠나니까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어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머뭇거리던 그녀가 결심한 듯 말을 꺼낸다.

 "오빠만 받아준다면 우리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오빠 생각은 어때요?"

 "그걸 말이라고! 난 진짜 너를 하루도 잊어본 적 없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게 여자라곤 너밖에 없는걸."

 진지하고 적극적인 정민의 구애는 프러포즈를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서진은 결혼식 날 행복한 신부처럼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우리 그만 여기서 나가요!"



 

 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 응급실에 도착했다.

 "제가 박정민 씨 보호잔데 어떻게 된 거죠?"

 간호사를 붙잡고 다급하게 외치자 복도에서  소리를 들은 경찰이 천천히 다가온다.

 "박정민 씨 아내분 되십니까? 부군께서는 금일 오후 7시 20분경 잠실역 3번 출구에서 무단횡단하다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방금 전에 안타깝게도..."

 

 경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경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남편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아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박정민 씨가 사고 당시 쥐고 있던 종이인데, 그냥 백지더군요. 혹시 이걸 본 적이 있거나 무엇이든 아는 바가 있으신지..."

 경찰이 건네는 쪽지를 받아본 미경은 섬찟 놀랐다. 종이 가득 빽빽이 적힌 검은 활자가 경찰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미경은 얼른 쪽지를 읽어본다.


 사모님, 이서진입니다. 6개월 전 사모님이 저를 찾아와 정민 씨의 부인이라고 밝히기 전까지, 저는 정말 그가 유부남인 걸 몰랐습니다.
 '내가 불륜녀, 상간녀라니!'
 정민 씨에 대한 배신감과 그에게 쉽사리 속은 나의 어리석음, 그리고 남들이 알게 되었을 때의 비난 등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어요.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목을 매었는데, 저승사자님이 그러시네요. 혼자 가면 처녀귀신으로 구천을 떠돌 테니 누구 한 명 데려가라고. 그래서 정민 씨를 카페로 불렀어요. 대신 3번의 기회를 주었죠. 카페에 나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사실 유부남이었다고, 아니 그냥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만 말해줘도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끝까지 저를 속이더라고요? 그래서 흔쾌히 정민 씨를 데려갑니다!


그러나 서진이 몰랐던 게 하나 더 있었다. 저승에서도 처녀 귀신은 유부남 귀신과 함께 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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