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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Jun 29. 2023

실제로 볼 수 없는 죽음을 선언하다

죽음에 대한 의문들

요양병원의 밤은 빠르게 저물어갑니다. 보통 환자분들은 8시에서 9시 사이에 주무시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깬 환자분들을 제외하면, 오직 간호사와 간병인 선생님들, 그리고 야간 당직의사인 저와 원무과 당직이신 분만 밤에 깬 상태로 조용히 자기 업무를 하게 됩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불이 꺼진 병동 가운데 유일하게 불이 켜진 스테이션에서 환자들의 모니터를 확인하면서 가끔 라운딩을 돕니다. 간병인 선생님들은 병실에 상주하며 환자분들 상태가 이상하지 않은가 확인하고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알립니다. 저는 보통 당직실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다가, 병동에서 호출이 오면 필요한 처방을 낸다거나 병동에 올라가서 필요한 처치를 합니다. 원무과 당직 선생님은 혹시나 밤에 상태 악화 면회라든지, 임종 면회를 오시는 보호자들을 위해 대기합니다.


그러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요양병원은 바빠집니다. 모니터에 산소 포화도라든가 혈압 등등 생체 징후(vital sign)가 떨어지면, 간호사 선생님들이 이를 확인하고 저에게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충분히 산소를 주고 있음에도 산소포화도가 낮게 나온다거나 혈압이 50/30 정도로 낮게 측정되거나, 심박수가 매우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하는 등 환자의 상태가 위중하면 저는 병동으로 올라가서 환자 상태를 확인합니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포기하지 않은 경우, 동맥혈 검사 등을 시행하고 기관 삽관을 시도해 보거나 승압제를 사용하여 혈압을 올리는 등의 연명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의무기록지에 DNR이라고 적혀있는 경우,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더라도 연명치료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경우 보호자에게 연락한 후에 할 수 있는 처치만 하고 밤을 잘 넘기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안타깝지만 많은 경우, 밤을 넘기시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 중 첫째는 임종 선언을 내리는 일입니다. 


사망선고, 혹은 임종 선언은 어떤 사람이 공식적으로 사망했다는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현행법상으로는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그리고 조산사(자신이 조산한 태아만 가능)만이 사망선고가 가능한 직업입니다. 아무리 환자가 사망한 게 명확해도, 의사의 선고 전에는 ‘심정지 상태’라고 표현할 뿐 위의 직업 외에는 사망선고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이는 민법상 정의되는 사람의 권리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사망진단서를 통해 한 사람의 죽음이 접수되면 그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모든 법적인 권리가 박탈됩니다. 그만큼 임종 선언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환자분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고 호흡이 정지되었다는 전화를 받아도 저는 병동에 올라가서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의사는 어떻게 환자의 사망을 확인할까요? 사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계속해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심장의 기능을 ECMO(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체외막 산소 공급) 같은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현대에는 어떤 장기의 기능 소실이 죽음의 기준이 되느냐에 대한 논란이 계속 있어서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국가별로 사망선고에 대한 권고안이 다르며, 전 세계적으로 죽음에 대한 판정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이 죽음에 대해 정의 내리기 어려움을 방증합니다. 다만 통상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심장과 폐 기능의 소실, 그로부터 생기는 신경학적 손상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의식 기능 소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고는 합니다.


이렇듯 개인의 사망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심폐사는 심장이나 호흡 기능 중 하나가 영구히 정지한 상태를 기준으로 합니다. 다만 심장 혹은 폐 기능의 영구 정지는 결국 뇌 기능의 영구 정지도 의미하기 때문에, 심폐사의 궁극적인 판정은 심장, 폐, 그리고 뇌 이렇게 세 가지 장기의 기능 소실을 기준으로 합니다. 반면 뇌사는 인공호흡기 등 인공적인 방법으로 심장과 폐의 기능은 유지되지만,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의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정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뇌사도 사망한 상태라고 판정하지만, 형법이나 민법, 그리고 법의학에서는 보통 심폐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저 역시도 환자분의 임종 선언을 하기 전에 심장, 폐, 그리고 뇌의 기능을 확인합니다. 우선 경동맥을 만져 맥박을 확인하고 심전도를 찍어서 심전도 그래프가 평평하게 나오는지(EKG flat) 확인합니다. 이후 흉곽에 움직임이 있는지, 자발호흡이 있는지, 무호흡인지 등을 파악한 후에는 동공반사를 확인하여 뇌 기능이 남았는지 확인합니다. 다만 이렇게 세 가지를 확인한 후 바로 선고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심정지 상태의 환자분이 호흡과 맥박이 없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임종 선언 관련 WHO의 권고 사항에서도 관찰 시간을 두고 검사를 반복할 것이 권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보호자에게 연락하고 난 뒤 보호자가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 동안 생체 징후를 나타내는 모니터라든가 동공반사 등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두어 번 확인하곤 합니다.


보호자가 병원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닌 이상, 저는 가능하면 보호자의 도착을 기다리고, 보호자가 동석한 상태에서 환자의 임종 선언을 내리곤 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관찰 시간을 두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만, 부모나 가족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한 채 임종 선언이 내려졌다는 것은 죄책감으로 남아 보호자를 괴롭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지 상태에 돌입한 시각과 공식적으로 임종 선언이 이루어지는 시각이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다만 임종 선언을 내릴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의 ‘죽음’을 논함에 있어서, 심장과 폐 기능이 소실됨으로 죽음을 정의하기에 충분할까요? 인간이 지닌 기능 중에 어떤 것이 소실되어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가령, 이 환자분께서 요양병원이 아닌 대형 종합병원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요양병원에는 없는 ECMO나 VAD(Ventricular Assist Device, 심실보조장치, 인공 심장의 일종) 같은 장치를 이용했으면 살아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혹은, 동일 조건에서 100년 뒤 의료기술이 훨씬 발달해서 심장과 폐가 멈춘 상황이라면, 앞서 말한 것보다 개선된 의료 기구를 통해서 죽음을 유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죽음까지 이르렀던 병들 중에서 지금은 적절한 치료만 받는다면 더 이상 무섭지 않은 병들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죽음은 다른 모습으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뇌사와 심폐사를 넘어, 또 다른 죽음의 정의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죽음에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사고실험이나 공상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령, 지금 기술 수준으로는 기억과 육체의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미래라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로보캅> 같은 SF 작품에서처럼, 환자 A의 심장과 폐는 소실되었고 뇌만 살아서 기계에 이식한 사이보그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 신체 일부만 남아있는 A라는 사이보그를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요? 혹은 <공각기동대> 같은 작품에서처럼 A의 기억이나 인격을 컴퓨터에 업로드할 수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육체는 아예 사라졌지만, 기억과 의식만 남아있는 상태가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A는 죽었다고 봐야 할까요? 죽어있다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살았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과연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던 A와 컴퓨터 속에 기억과 인격만 남은 A를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내 기억과 인격일까요? 혹은 현재로선 감지 불가능한 비물질적인 존재, 소위 영혼이 정말로 존재하여 영혼의 유무에 따라 인간인지 아닌지가 정해지는 걸까요? ‘어떻게 죽음을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다 보니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까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에 대한 주제로 회귀하게 됩니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삶 중에서 ‘무엇’이 죽음으로 끝나는가에 대해 아직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특히 임종 선언을 내리다 보면 ‘내가 내리는 이 선언이 정말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자주 듭니다. 아마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죽음을 선언하고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정말 자주 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사회의 논의 자체도 충분하지 않고, 그에 대해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도 충분하지 않으며, 저 역시도 죽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언급하는 자체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지는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장례식에 참가하기 전에, 그리고 사망선고를 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죽음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 재밌는 내용이 나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모든 인간에게 항상 언젠가 닥쳐올 죽음이 문제가 되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회피한 채, 일상성에 묻혀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볼 때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적 사건으로만 받아들이지, 언젠가 나에게 닥쳐올 ‘존재에 관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지만, 아직 나는 죽지 않았다’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셈이죠.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 찾아올 자기 죽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죽음을 마주하고 고민할 때에서야,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고, 지금껏 살아오던 일상적인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지를 고뇌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로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죽음을 언제든 닥칠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이를 기반으로 삶을 기획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했으며, 이 과정을 ‘죽음으로의 선구’라고 명명했습니다. 저 역시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면서 나의 죽음,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의 선구’. 과연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하이데거의 사상이라고 할까요. 죽음이라는 심연을 오롯이 직시할 때, 인간은 그제야 본래의 자신을 알아갈 수 있다는 말은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라 해도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실제로 볼 수 없기에, 인간은 삶과 죽음 앞에서 숙명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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