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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Jun 24. 2023

요양병원에서 첫 임종 선언

죽음에 대한 사유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 정문에는 키가 낮은 화분 몇 개가 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병원 보랏빛 간판 아래, 유리 대문은 조심스레 열려있습니다. 황혼이 스치면 바로 앞 가로등이 유리에 반사되곤 합니다. 이 유리 대문을 들어서며 ‘어르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해집니다. 기나긴 인생길의 굽은 허리를 펴며 쉴만한 곳이라 기뻤을 수도 있고, 자식들 품에 안겨서 또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지만 버려진 느낌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요양병원 정문은 제게 있어서는 묵직한 사색의 공간을 열어주는 문입니다. 제 직업이 임종 선언을 할 수 있는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사망선고를 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선잠을 자던 중 새벽 3시 10분에 전화가 왔습니다. “환자 심박수가 쳐집니다, 선생님.” 잠이 확 깨서 바로 병동에 올라갔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DNR(Do Not Resuscitate, 연명치료 포기 표시)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연명의료결정법상 심폐소생술도 할 수 없었고, 승압제도 쓸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보호자에게 연락만 드린 채 환자의 생명이 꺼지는 것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보호자는 10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으나, 그때는 환자가 이미 심정지 상태에 들어간 시점이었습니다. 보호자가 환자와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잠시 기다린 후, 3시 40분에 임종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보호자가 환자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릴 때, 저 역시 슬픔을 삼켰습니다.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당시 저는 수능을 앞둔 상태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장례식에만 참석했습니다. 8년이 지났어도, 제가 기억하는 첫 죽음이었기에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상실감, 살아계실 동안 더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언젠가 나도 죽을 것이라는 실감에서 오는 허무함 등등…. 무엇보다 가장 컸던 감정은, 나를 정말 아끼셨던 할아버지께서 내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사람이 될지 더 이상 보실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슬픔이었습니다. 보호자의 울음에 담긴 감정이 너무 공감되어서, 저도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임종 선언을 한 후 보호자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락을 드렸던 시점에서 환자분 심박과 혈압이 떨어진 상태셨고, 도착하시기 얼마 전에 심정지가 오셨습니다.” “그랬군요. 요양병원에 모실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렇게 갑작스레 가실 줄은 몰랐어요. 아버님 마지막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주무시다 편히 가셨을 겁니다.” 이후 고인을 어느 장례식장에 모실지 등을 이야기하다 보호자를 배웅하고 저는 당직실로 향했습니다.   

  

갑작스레 가실 줄 몰랐다, 라…. 보호자의 말을 곱씹다 보니 제 친구의 장례식이 생각났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제가 20살 때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의 부모님 장례식에는 가봤어도, 친구의 죽음을 접한 건 처음이라 슬프기보단 현실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보면서도 어안이 벙벙하고 비현실감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생각 자체를 못 했죠. 돌이켜보면, 죽음은 누구에게든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다만 모두가 그걸 잊은 채,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한 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당직실에 도착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생각을 이어 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례식에 갔을 때 말고 죽음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요. 창작물에서 인물이 죽을 때에도, 저는 ‘이야기 전개상 죽음이 작품 흐름에 적합하다/그 인물의 죽음은 영웅적이었다’ 정도를 평가할 뿐,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죽음에서만 무언가를 느낄 뿐, 사람들은 대부분 평소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의 주변인들이 유산이나 자신들의 승진만을 생각하듯이요. 어떻게 생각하면,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다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제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가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 술기를 시행한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졌고, 결국 그 환자는 심정지가 와서 심폐소생술을 받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주치의가 와서 “원래 상태가 위중하신 분이었고, 몇 번이고 기관 삽관을 했던 분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제 친구는 자책감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바쁜 대학병원 특성상, 반나절 정도 바쁘게 뛰어다니자 그 감상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고 말했죠. 생각해 보면 제가 대학병원이 아닌 요양병원에서 일하기를 선택했기에, 보호자의 입장에 공감할 심적 여유가 생겼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삶에 치이다 보면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고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긴 점점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저는 오늘도 퇴근길에 3호선을 탑니다. 간간이 지하철은 흔들리고 승객들은 오후라서 그런지 몹시 지쳐 보입니다. 승객들은 오늘 하루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상상한 적이 있을까요? 초상집에 다녀오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고,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그것은 드문 일일 것입니다. 안내 방송에서 멘트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종착역인 오금, 오금역입니다.” 삶의 종착역을 바라보며, 저는 오늘도 생각에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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