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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Jul 04. 2023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다

죽는 순간의 모습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 근처 공원에 이름 모를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큰 꽃의 얼굴을 맞이하며 하루의 희망을 부풀려 보는 순간만큼은 행복합니다. 저는 요양병원에서 야간당직을 맡은 의사입니다. 요양병원 야간당직은 감정적으로 힘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외향적인 저는 특히 밤새 당직실에서 홀로 대기하는 게 때로 외롭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침에 퇴근하면 피곤하더라도 바깥에 나가서 햇볕을 쐬면서 사람 구경에 심취하곤 합니다. 마침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 후문에는 공원이 있습니다. 날씨 좋은 날 점심시간 전후로 바깥에 나오면 따뜻한 햇볕 아래 어르신들이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시거나,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과 노는,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는 평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저는 병원 안에 계신 환자분들 생각에 빠지면서 슬퍼집니다. ‘과연 누워 계신 환자분들 중 몇 분이나 요양병원 문턱을 다시 밟고 나오셔서 이 장면을 보실 수 있을까?’  

    

요양병원에 계신 환자분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대학이나 종합병원에서 치료받으신 후에 대학병원에 계속 있기엔 질환의 중증도가 낮아서 전원 오신 분들입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환자분들 중 대부분은 재활 운동 열심히 하시다가 퇴원하시는, 비교적 경과가 좋으신 분들입니다. 두 번째는 대학이나 종합병원에서 더 이상 완치를 위한 의학적인 치료가 어려우나 완화를 위한 의학적 돌봄이 필요한 환자분들입니다. 이 환자분들의 경우 주로 증상 완화를 위한 의학적인 돌봄을 받으시며 때로는 퇴원하셔서 집으로 가시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제가 주로 마주하는, 항상 누워 계신(bed-ridden) 환자분들입니다. 더 이상 치료받는 게 무의미하지만, 의학적인 돌봄이 필요하시기에 요양병원으로 오신 분들이죠. 대부분 나이가 많으시고, 의식이 없으신 분들도 많으시며,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환자분들은 타원으로 전원을 가시거나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퇴원하시는 게 아닌 이상, 살아서 퇴원하시는 분은 거의 안 계십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제가 실습을 돌았던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은 달라서 이질감이 들기도 합니다. 대학병원은 기본적으로 급성기 질환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며, 상태가 정말로 심각한 환자나 대학병원 세팅에서만 치료할 수 있는 환자, 혹은 희귀한 질환을 앓는 환자의 치료를 담당합니다. 그렇기에 대학병원에서의 치료의 목표는 ‘현대 의학으로 가능한 최선의 치료를 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요양병원의 경우 대부분 급성기가 지난,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요양병원은 첫 번째 범주의 환자분들에게는 말 그대로 요양에 특화된 병원의 역할을 하지만, 두 번째 범주의 환자분들에게는 삶의 종착역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요양병원에서 치료의 목표는 대학병원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요양병원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한다는 점에선 다름이 없지만,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최선의 치료’이냐, 혹은 남은 시간 동안 편안하게 계실 수 있게 돕는, ‘편안한 죽음을 향한 최선의 치료’이냐로 방향성이 갈리게 됩니다.     


다만 ‘편안한 죽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어떤 죽음이 과연 편안한 죽음일까요? 문득 학창 시절 상상했던 제 삶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정확히 어떤 과목 수업 시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그 수업 당시에 떠올렸던 제 죽음의 모습은 클리셰 덩어리였습니다. 흰색 벽지가 발린 벽, 창문 옆에 자리 잡은 침대, 창문 밖에서 들리는 새 지저귀는 소리, 침대 주변에 서 있는 혈육들과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 뒤 천천히 눈을 감는 모습은 너무 창의성 없는 이상적인 죽음의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는 그 수업 이후로 제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친구의 장례식에서도, 죽음에서 오는 허망함에 정신 못 차린 상태로 슬퍼하거나 멍하게 있었을 뿐입니다.     


문득 2번째로 임종 선언을 내렸던 환자분이 생각났습니다. 병동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병실로 올라와, 보호자께 연락을 드린 후 잦아드는 환자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습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멈춘 후 동공반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봤는데, 그분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심정지 상태로 계셨고, 눈가로 눈물 흐른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임종에 가까워질 때 몸에서 분비물이 나올 수 있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생리적인 반응이지만, 저는 그분이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그 의문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환자분께선 당신과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같은 방에 누워있다가 자신의 지인 그 누구도 찾아오지 못하는 밤에, 쓸쓸히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전에 상상하셨을까요. 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은 자연스레 누워계신 환자분들께 옮겨갔습니다. 과연 요양병원에서 쇠약한 상태로 누워 계신 채 다가오는 끝을 기다리는 지금의 모습을 환자분들은 상상하셨을 수 있으셨을까요. 병실 밖으로 보이는 햇살을 보며, 무슨 생각을 이어 나가셨을까요. 어쩌면 혈중 여러 수치가 이상하거나 산소 부족으로 인한 뇌 손상, 패혈증 등의 원인으로 의식이 혼탁하셔서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분들은 죽음을 앞두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리고, 이분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변수도 너무 많고 무엇 하나 정해진 게 없었기에 저는 답이 없는 질문 앞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빠진 제 근처로 공이 하나 데구르르 굴러왔습니다. 공이 굴러온 방향을 보니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조그마한 아이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공을 굴려서 아이에게 보내주자 아이는 빵긋 웃으며 배꼽 인사를 하더군요.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굳어있던 제 얼굴에 미소가 걸리는 걸 느끼며, 생각이 전환되는 걸 느꼈습니다. 언젠가 제 육신은 죽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제 아이는 남아서 제 죽음을 추모하겠죠. 문득 에머슨의 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내가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 에머슨, <무엇이 사는 것인가> 중에서          



제 죽음의 모습이 어떻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은 누구에게나 임박해 있으며,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할 것은 간단합니다. 제 주변을, 그리고 나중에 태어날 제 아이를 위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 제 좌우명처럼,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가는 것.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까 공을 받았던 아이의 웃음을 떠올리며, 저도 빵긋 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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