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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Jul 13. 2023

글을 깨며

좋은 글을 위해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내 손은 키보드 위에서 갈 곳 잃은 채 헤매고 있다. 검은 글씨가 몇 자 적힌 흰 화면에 커서가 깜박이고 있다. 그 깜박거림이 나를 재촉하는 것 같기도,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쉰다.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이 백스페이스키를 누른다. 이내 글씨는 전부 사라지고 흰 공백만이 남는다. “뚜왕!”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화면 속 홀로 검은색으로 남겨진 커서는 계속 깜빡거리면서 나를 탓한다. 그 책망을 견디기 힘들어 노트북을 덮는다. 오늘도 난,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깨버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어떤 글이든 일단 쓰고 봤다. 쓰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기에 아무 주제나 가지고 다 글을 썼다. 처음 글을 쓰는 주제에 중장편 소설을 쓴다거나. 군의관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기를 쓴다거나.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쓴다거나. 사실, 지금도 쓰고 싶은 글은 많다. 정말 많다. 요양병원과 죽음에 대한 연작 수필, 구상만 가득한 단편 소설들 등등…. 다만 내 손끝에서 글이 통 나오질 않을 뿐이다. 정확히는 맘에 들게 잘 쓴, 좋은 글이 잘 나오질 않는다. 


예전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지금은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우매함의 봉우리’를 넘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에 의하면 특정 분야에 조금 아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만,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진다. 우매함의 봉우리는 x축을 지식 혹은 지혜, y축을 자신감으로 놓고 그래프를 그리면 그래프 초반에 봉우리가 생기는 걸 이르는 말이다.      

우매함의 봉우리, 그 정상에 올랐을 때가 기억난다. 그땐 세상은 글감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글감이든 내가 잡아채서 쓰는 족족 좋은 글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 시절 나는 전혀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 있는 것을 글로써 꺼내는 것에만 온 힘을 다했을 뿐이었다. 요즘은 글쓰기에 매진할수록 끝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어쩌면 요즘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은, 나도 모르게 글쓰기의 선악과를 먹어버리고 생명과를 바라보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내 못 쓴 글의 부끄러움을 알아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 결과, 어떤 글이든 잘 써지는 낙원에서 추방되어 글형극이라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차이는 잘 쓴 글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어떠한 글이든 쓰고 싶은 것을 편하게 쓰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내 세계에 갇힌 채 쓰는 글은 스스로 하는 한풀이에 불과하다. 그것 역시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잘 쓴 글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글은 언어요, 문자이고 이는 곧 소통을 의미한다. 때문에, 잘 쓴 글이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어떠한 감흥을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독자가 읽기 전후로 자기 생각이나 인식 등이 달라졌다고 느끼면, 그 글은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의 조합에 담긴 의미만으로, 잠시라도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 어지간히 잘 쓰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인지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그런 기준을 깨달은 이상 어쩔 수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난 글쓰기에 진심이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더 이상 수준 미달의 부끄러운 글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에서 제대로 못 지은 독은 가마에서 자연스레 “뚜왕!”하면서 터지지만, 내가 쓴 글 중 못 쓴 글들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글을 쓰던 중에, 혹은 쓰고 나서도 계속 글을 쳐다본다. 그리고 글이 맘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깨버리는 것이다. 쓰는 대로 다 좋은 글일 줄 알았던 예전을 반성하며, 오늘도 나는 글을 깬다. 그렇게 글을 쓰다가 깨다가 하다 보면, 언젠간 글이 탐스럽게 빚어질 것이다. 그 글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려진다. 이 초록으로 버무려진 초복의 더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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