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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Aug 18. 2023

야간당직의의 평화로운 일상

 7월 중순, 매운 여름을 여는 매미의 세레나데가 귓전을 때리는 월요일입니다. 저의 한 주는 옷가지와 노트북, 책 등이 담긴 책가방과 단백질 쉐이크 통 여러 개가 담긴 쇼핑백을 챙기는 걸로 시작됩니다. 출근하는 것, 저는 월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요양병원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의 6평 남짓한 당직실에는 웬만한 건 다 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왼쪽에 침대가 있고, 침대 건너편에는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있습니다. 책상 옆에는 의사 가운과 병원복이 들어있는 옷장이 있습니다. 벽 쪽에는 탕비장이 있어, 밤을 지새우며 먹을 수 있는 과자나 컵라면 같은 부식이 들어있습니다. 냉장고도 있어 샐러드나 방울토마토, 혹은 음료수 등을 넣어서 먹고는 합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뭘 데워먹을 수가 없어서, 닭가슴살을 데워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배부른 투정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어지간한 건 다 갖춰져 있기에, 저는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집과 요양병원이 왕복 2시간 반 정도 걸리기 때문에,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기보다는 그냥 아늑한 당직실에서 단잠을 자고 주말에만 본가에 들르는 것입니다. 


 제 근무시간은 평일 오후 5시 반부터 다음 날 아침 8시 반까지입니다. 숙식을 전부 여기서 해결해야 하는 저는, 월요일 오후 4시쯤 출근하여 짐을 풀고 바깥에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일찍 밥을 먹고 근무를 준비합니다.

 요즘은 다이어트 중이라, 집에서부터 밸런스밀 단백질 쉐이크 여덟 통 정도를 챙겨서 5일 동안 천천히 나눠 먹습니다. 남은 끼니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반 정도만 먹거나, 주변 파리바게트나 샐러디에서 샐러드를 사 먹고는 합니다. 요즘은 샐러드와 닭가슴살이 맛있게 나와서 다이어트를 해도 입이 즐겁습니다.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 3kg이 빠졌군요. 행복합니다.


 근무 중에 호출이 없는 시간에는 보통 책을 읽습니다. 요즘 읽는 책은 요양병원에 관한 책입니다. 글자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책을 읽어주는 북튜브 영상을 보거나 밀리의 서재에 있는 오디오북을 통해서 책 내용을 귀로 듣곤 합니다.


 그렇게 저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병동에서 호출이 옵니다. 대부분의 호출은 그렇게 까다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혈당이 너무 높거나 낮다거나, 열이 있다거나, 통증이 있다거나, 속이 메스껍다거나, 한 환자분이 자꾸 소리를 내셔서 다른 분들이 잠을 못 주무신다거나 등등의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각각의 상황마다 알맞은 약을 처방하고, 필요한 처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뭔가 평소와 결이 살짝 다른 호출이 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기 5층 병동인데요, 5○○호 ○○○ 환자분 이러이러한 기저질환 있으신 분인데, 지금 약 드시기를 거부하셔서요. 혹시 오셔서 설득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약 드시기를 거부한다? 일단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실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명료하시고 의사소통이 잘 되는 분이라는 뜻이니 반가웠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은 3층을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분들의 중환자실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하는데, 주로 3층 병동에서 저를 많이 호출합니다. 3층에 계신 대부분의 환자분은 의식이 명료하지 않으시고, 의식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의사 표현이 제대로 안 되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3층은 다른 어느 층보다 죽음에 가까워진 분들이 많이 계신 병동이다 보니, 분위기 자체가 좀 다르달까요. 그래서 3층 이외에 다른 층에서 이렇게 호출이 오면,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반갑기까지 할 때가 있습니다.


 5층으로 올라가 환자분을 뵈었습니다. 환자분은 낯빛이 그리 좋지 않은 남자 환자분이었습니다. 정맥에 혈전이 생겨서 혈전 제거술을 받았던 분이었고, 그 이후로 와파린을 먹던 분이셨습니다. 코에는 산소를 공급하는 콧줄을 끼고 계셨습니다. 병동에 올라가서도 간호사 선생님이랑 가볍게 실랑이하고 계셨던 환자분은 저를 보자 하소연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아까 혈압이 높다 그래서 고혈압 약을 처방 주셨잖아요. 그런데 이 복약지도서에 보니까 와파린과 고혈압약을 같이 먹으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대요. 그래서 오늘 먹어야 할 와파린은 안 먹으면 안 될까요?”


 와파린은 쉽게 말해서 피를 묽게 해주는 약입니다. 피는 묽어졌다 진해졌다 하며 평형을 이루는데, 피가 너무 묽어지면 출혈이 발생하고 너무 진해지면 굳어서 혈전을 만듭니다. 혈전은 피가 굳어서 생긴 피딱지 같은 것인데, 이게 여기저기로 날아가서 뇌혈관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뇌경색이 오는 것이지요. 때문에, 혈전의 과거력이 있는 경우 혈전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와파린을 꾸준히 먹는 것입니다. 다만 와파린은 다른 약과의 상호작용이 많아서 사용에 주의가 필요한데, 그 상호작용하는 약 중 하나가 고혈압약이어서 복약지도서에 적혀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부작용이 두려워 와파린을 하루 빼먹는 건 득보다 실이 큰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아 환자분과 실랑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분, 그래도 와파린은 드시는 게 좋아요.”

 “아니 나는 부작용이 생길까 봐…. 혹시나 해서 말이지….”

 “환자분께서 걱정하시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와파린을 하루 빼먹는 건 득보다 실이 큰 행위라서 그래요.”


 간호사 선생님이 옆에서 지원 사격을 해주셨습니다. “오죽하면 의사 선생님이 병동 올라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알겠어….” 결국 환자분은 설득당하셔서 약을 드시기로 하셨습니다. 다행이네요! 오늘도 보람찬 일을 해냈습니다. 저는 안심하고 다시 당직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 이후로 몇 통의 전화를 받으니 잠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보통 12시에 자서 5시에 일어납니다. 근로 계약서에 제 쉬는 시간이 그렇게 적혀있기도 하고, 보통 어지간한 응급상황 아니면 12시부터 5시까지는 거의 전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5시 반부터는 환자분들이 아침 식사하시다가 토를 하신다든지 혈당에 이슈가 생긴다든지의 호출이 올 수 있기에 깨어있는 편입니다. 5시간 정도밖에 못 자기 때문에, 부족한 잠은 근무시간 끝나고 낮잠으로 보충을 하는 편입니다. 5시에 일어나서는 일단 씻고, 단백질 쉐이크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오전 8시 반, 하루의 근무가 끝나면 간밤 어떤 호출들이 있었는지 인계를 남긴 후에 자러 갑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인 아침 햇살이 제게는 아침 노을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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