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힘
밥알들이 위 속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요 며칠 밥을 먹고, 앉아서 일만 해서 그런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소화가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인진쑥을 먹으면 나아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길게 가는 듯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체했던 것 같다며 내 위가 전혀 작동을 안 하고 있다고 했다.
약을 먹고, 걷기 운동도 좀 하고, 핫팩도 좀 하며 일주일을 보내라고 하셔서
오늘부터 다시 걷기 운동도 시작했다.
둘째를 학교에 보내고 동네 산책길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어느새 나뭇잎들이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걷다보니 집에 오는 길에는 기운도 없고,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기가 돌아서였을까 집 앞 마트를 지나쳐 오는데 오늘따라 생선이 유난히 싱싱해 보였다.
배가 노란 조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데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조기를 참 좋아하셨던 우리 할머니.
연세가 드셔서도 눈이 좋은 편이라 아빠가 가시를 잘 발라내지 못하실 때
할머니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작은 생선가시들을 잘도 발라 주셨다.
나이가 들면 소화가 잘 안된다며 누룽지를 팍팍 끓여서
그 위에 조기를 얹어 식사를 하시곤 했던 할머니.
가끔 나는 가시를 발라내는 일이 귀찮아서 생선을 대충 발라먹었는데
"깨끗이 발라먹어야지. 이게 뭐야?"
라며 내 접시를 본인 앞에 가져가셔서는
정말 가시만 빼고 살은 모두 발라드셨다.
할머니의 없던 입맛을 돋우던 조기가
오늘은 생선코너에서 나 좀 데려가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의 할머니처럼 누룽지를 끓여서 가시를 발라낸 조기를 얹어 먹으면
소화도 잘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난 이미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조기 10마리를 깨끗이 씻고 지느러미와 비늘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비늘을 칼로 긁어내는데 은빛 비늘 하나가 탁 튀어 내 옷에 달라붙었다.
칼로 비늘을 밀어내는데 은빛의 비늘들이 내 머리 위에, 손목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언젠가 경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여섯식구 먹거리를 책임지느라
우리가 한창 크던 때에는 무엇이든 늘 대량 구입을 하셨던 엄마.
더구나 조기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식재료라 떨어지지 않게 냉장고에 늘 쟁여두셨는데
그러려면 몇 두릅씩 사다가 미리 손질을 해야만 했다.
당시 싱크대를 가득 채운 조기들은 바삐 비늘을 벗기는 엄마의 손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일까 한 쪽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는
빠른 손놀림으로 은빛 비늘들을 단숨에 벗겨내셨다.
그러다 튀어나간 조기 비늘 몇 개가 엄마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밥을 먹는 내내 상 맞은편에 앉아있던 엄마의 머리칼에서 반짝반짝 흔들리던 조기 비늘들.
엄마의 이런 노고 덕분에 우리는 조기와 함께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렇게 엄마는 조기 한 마리, 한 마리에 따뜻한 마음을 입혀서 구워주셨다.
그때의 엄마를 생각하며 나도 조기 손질을 했다.
최대한 깨끗하게, 비늘은 남김없이 벗겨내고
흐르는 물에 잘 닦아서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조기들을 내려놓았다.
"차르르르"
기름 튀는 소리와 함께 조기 익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나갔다.
딸들은 배가 고픈지 상 차리는 것을 재촉했다.
바삭하게 구운 조기와 금방 한 밥의 환상적인 조화에 아이들은 정말 맛있다며 스스로 살도 잘 발라먹었다.
나도 팍팍 끓인 누룽지에 조기살을 올려놓고 천천히 꼬옥꼭 오래오래 씹어서 먹었다.
이렇게 잘 먹고 나니 속이 부대끼지도 않고 내 안에 '조~오~기' 숨어 있던 힘도 막 솟아나는 듯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을 품었던 조기의 추억,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듯이 언제가 우리 딸들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