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에서 글쓰기를 업으로 시작하기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바라던 서울의 ㅇㅇ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인턴 6개월, 이후 1년 간의 자격증과 NCS 시험 준비 그리고 면접 등 높은 경쟁률을 뚫고 마침내 합격 소식을 듣기까지 대장정의 시간을 거쳐왔다. 당시 공공기관에 다닌다는 건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받아 대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요,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지름길이었다. 나 스스로 무척 대견했고 가족의 자랑이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부러움과 축하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름 안전지대에 안착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정직원이 된 이후 인턴때와 다르게 책임감도 커졌고 부서가 바뀌면서 새로운 업무와 조직에 적응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신입사원이라 눈치를 많이 봤고 업무를 숙지하고 처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야근이 잦았으며 주말까지 반납해야만 겨우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결국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심해지면서 회사를 더 다닐지 말지를 놓고 가족들과 다투었다. 급기야 밤마다 천식이 올라와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상태가 계속 나빠지자 응급실까지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생각했던 직장 생활은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맞춰진 걸까. 남들은 잘만 다니는데 내가 너무 나약한 걸까. 그만 두면 앞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닐까 등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처음엔 직장 다니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에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데 모니터의 글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인지능력까지 떨어져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 후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감성형 인간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한 가지 일에 몰입하기를 좋아하며, 인간관계에서도 친절과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 반면 직장에서의 업무는 밀려오는 일들을 기계처럼 빨리 쳐내야 했고, 민원에 시달려야 했으며 암묵적인 경쟁 관계에서 냉혹함을 경험했다. 한마디로 내 성향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를 그만둔 뒤 시간이 많아졌다. 우선 잘 먹고 잘 자는 것부터 시작해 정신질환과 천식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녔다. 내면과 감정을 보살피기 위해 심리학 서적을 읽거나 여행을 떠나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 윤홍균 원장님이 쓴 <자존감 수업>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 적어보기' 부분을 실제로 작성해 보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잘하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고 또 앞으로 잘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자라오면서 운이 좋게도 글쓰기에 관한 좋은 경험들이 있었는데, 세 가지 정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경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시를 쓰는 수업 시간에 일어났다. 담임 선생님께서 한 친구가 시를 굉장히 잘 썼다며 학급 전체를 대상으로 읽어 주셨는데 그게 바로 내가 쓴 시였던 것이다. 나는 늘 사고를 많이 치는 개구쟁이였는데,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당시 썼던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대략 구름을 달달한 설탕으로 묘사하여 커피 한 잔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도 시적 감수성과 표현력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두 번째는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학교는 기술 전문대학이었는데, 학과장님은 굉장히 인문 소양이 뛰어난 분이었고 기술뿐 아니라, 글쓰기와 같은 표현 능력도 함께 배우길 원하셨다. 어느 날 MT를 다녀와서 느낀 점을 리포트로 제출하라고 과제를 내셨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나는 왠지 그 과제를 진심으로 잘 해내고 싶었다. MT에서의 경험과 감상을 감수성 있게 빼곡히 채워서 제출했는데, 학과장님이 내 리포트를 대학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어주신 것이 아닌가.
마지막 이야기는 군복무 중에 벌어졌다. 나는 군 복무 대신 외교부 산하의 코이카를 통해 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세네갈에 파견됐다. 당시에 봉사단원들에게는 기관에서 활동하면서 필요한 물품을 신청할 수 있는 '활동물품지원' 제도가 있었다. 딱히 양식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는데, 깔끔하게 정리한 내 보고서가 정식 채택되어 모든 단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전체 이메일에 '활동물품지원_유O선' 이름의 워드 파일이 1년 넘게 공유되었다.
지난날 마치 운명의 손이 매번 이 길을 한번 가보자고 손짓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글쓰기란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복잡한 생각들을 날 것 그대로 토로해도 괜찮은 편한 친구요, 나의 이야기를 쓸 때면 온전히 집중력이 발휘되고 세상 사람들과 이어주는 매력적인 도구다. 글쓰기는 분명 나의 성향과 잘 맞는다. 돈 버는 일은 잠시 차치하더라도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허상을 좇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다운 길을 단단히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