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일 년에 한두 번 싸울까 말까 할 정도로 잘 싸우지 않는다. 내가 감정 기복이 좀 심해도, 남편이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8년째 재택근무 중인 남편과 집안일 분담이 확실해서 크게 싸울 일이 없기에. 하지만 둘 다 예민한 시기에는 말 한마디에도 불같이 싸우게 된다. 그날 역시 그랬다.
친정언니 가족과 친정아버지 확진 소식에 속 시끄러웠던 저녁이었다.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딱히 외식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밥 생각이 전혀 없는 내가 가족을 위해 의무감에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뭐 좀 도와줄까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남편이 오늘따라 거슬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남편이 말했다.
"위드 코로나로 가야 해. 감기 취급해야 한다고..."
감기? 그 말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지금 친정언니가 확진돼서 독감보다 아프고, 기침이 심해서 통화도 어려울 정도인데 감기처럼 취급하자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우리 언니가 아픈데 뭐가 감기처럼 취급해야 한다는 거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내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니까 평소 화를 내지 않던 남편이 황당해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처형 아픈 걸 감기처럼 여기자는 게 아니잖아. 거래처에서도 확진자 나와서 일에 차질 생기고 일이 꼬이니까 하는 말이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래, 생각해보니 전날부터 신랑한테 일정 연기, 취소되는 연락이 많이 오긴 했다. 신랑 말에 틀린 건 없었지만 내가 실수로 화를 낸 거라고 하기엔 이미 내 마음이 꼬일 대로 꼬인 뒤였다. 설사 남편 일이 좀 힘들어졌다고 우리 언니가 아프다는데 걱정을 해주지도 않고,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아내 마음도 살펴주지 않다니. 남편은 이미 나에게 대역죄인이었다.
나는 남편과 싸우면 더 감정적으로 변하는데 남편은 반대였다. 내가 더 이성을 잃을수록 남편은 더 냉정하게 따박따박 내 잘못을 따지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듯이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당신 말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말에 서운해서 화를 냈다고 했다. 남편은 처형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 말이었고 자기 일 힘들어진 건 안 보이냐고 화를 냈다. 둘 다 서로의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유치하게도 화가 나니까 남편 저녁을 주기 싫어서 보란 듯이 아이 저녁만 대충 차렸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남편은 그 모습에 마음이 상해 매일 하고 있는 계단 오르기를 하러 나갔다. 안방에서 신랑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니까 더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얼마 뒤 10살 꾸마가 대충 저녁을 먹고 눈치를 살피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엄마, 아빠가 싸우면 어떻게 해서든 화해를 시켜주려고 애쓰는 딸이라서 또 잔소리를 하겠다 싶었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어때?"
뭐? 내가 먼저 사과하라고? 아이의 말에 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유치하게도 나는 편 가르기를 했다.
"꾸마야. 너는 아빠 편이야? 아빠가 잘못했는데 왜 나보고 사과하라는 거야?"
괜스레 화살이 꾸마에게 향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도 평소에 엄마한테 하나도 안 미안한데, 미안하다고 잘 말하거든."
허걱. 허를 찌르는 아이 말에 나는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자기반성이 빠른 편이고 사과를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내가 잘못한 일이라고 여기면 미안하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한다. 나를 닮아가는 건지 아이 역시 내가 혼내면 "엄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를 잘 구한다. 그런데 아이의 말마따나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사과를 한 거라니. 왠지 모를 배신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 말대로 사과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일까 싶었다.
아이의 조언 아닌 조언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상태가 되긴 했다. 하지만 부부 싸움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던 내 당부를 어긴 남편을 벌주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현관문 보조 자물쇠까지 채워놓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통쾌한 생각이 드는 순간, 도어록 잠금 해제 소리가 들렸다. 보조 자물쇠까지 잠글지 말지 고민하다가 복수할 타이밍을 놓쳐서 아쉬웠다.
여전히 마음이 꼬여있기도 했고 맨날 내가 먼저 사과하는 사람인가도 싶어서 이번엔 남편이 사과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평소 아이처럼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좀 전에 아이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전혀 안 미안한데 미안하다고 말하냐면서 남편과 2차전을 시작했을 텐데 아니었다. 전과는 다르게 힘들게 사과하는 남편의 마음이 보여서인지 화난 마음이 누그려졌다.
그래도 심각한 분위기에서 나는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현관문 보조 자물쇠를 잠그려고 했다고 자백했다. 미안하다고 말한 뒤 머쓱해진 남편이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말에 황당해하면서 결국 웃었다. 남편이 웃으니까 나도 웃었다. 어느새 화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어느 책에선가 다소 복잡한 상황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게 분위기를 좋아지게 할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남편이 계단 오르기를 하러 나간 30분 동안 이렇게 싸웠으니 며칠 동안은 말도 하지 말아야지, 이번에는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쓸데없는 나의 다짐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싸움은 종료되었다. 그러고 보니 8년 전 사업 시작하고 남편과 별 일 아닌 일에, 말 한마디에도 숱하게 싸웠다. 맞벌이 부부니까 공평하게 집안일 분담하자는 의도로 말한 짜증 섞인 내 부탁이 남편이 볼 때는 시키는 말이라고 여겨 기분이 상해지기 일쑤였다. 우리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사이였다. 급기야 집에 남편이 있었지만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나는 집에 있는 남편과 담을 쌓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쌓은 담 때문에 부부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함께 있어도 나는 외로웠다.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어도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지나고 보니 남편이 재택근무 한 지 8년 동안 4~5년은 힘들었고, 2~3년은 안정기에 들어와서 편안해진 것 같다. 여전히 별일 아닌 일에 화를 내고 남편은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아이의 말대로 전혀 미안하지 않아도 먼저 미안하다고 손 내밀 수 있는 가족이 있기에 나는 적어도 8년 전보다 행복한 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