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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Apr 01. 2022

슬럼프를 극복하게 만드는 아이의 말 한마디

2주 가까이 수없이 '나, 슬럼프인가?'를 되뇌며 무기력한 일상을 보냈다. 겨우 6시에 일어나서 고등학생 조카를 깨워 아침을 챙겨주고, 7시 반에 초3 아이를 깨워 등교 준비를 한 뒤, 자거나 멍 때리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하교한 아이의 간식을 챙겨주고, 다시 잠자리에 누워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힘들게 일어나 저녁 준비를 했다. 작가로서의 일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챙겨야 하니까 겨우 집안일을 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건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보면서 30분 요가를 하고 드라마 성경 1장 듣기, 짧은 명상하기였다. 이걸 할 수 있었던 건 1년 넘게 매일 하는 습관이었기에 가능했다.


내 일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초3이 되니까 부쩍 학교, 학원 숙제가 많다며 투덜대던 딸이 날 보며 말했다.


"엄마, 나는 숙제 많아서 바쁜데 엄마는 왜 그렇게 빈둥거려?"


'빈둥거려'가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엄마가 언제 빈둥거렸다고 그래? 너 좀 말이 심하다!"


딸에게 언짢은 내색을 보이고 기어이 아이한테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개운치 않았다. 나는 뒤끝이 작렬한 사람이기에 며칠 동안 아이에게 엄마한테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냐고 속상한 티를 팍팍 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19 이후 부쩍 살이 찌는 나한테 하도 "엄마, 살 좀 빼!" 면박을 주는 딸에게 마치 설득을 하듯이 말한 적이 있다.


"꾸마야, 너는 장난으로 말해도, 살찐 사람한테 '돼지'라고 하고, 탈모 있는 사람한테 '대머리'라고 하면 엄청 큰 상처가 될 수 있어!"


딱 그랬다. 실제로 아이 말마따나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무심결에 한 말에 정곡을 찌른 것처럼 뜨끔했다. 그리고 최근에 몇 년 만에 만난 고교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까 그 친구가 그랬다. 아이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슬럼프를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극복하려 할수록 몸과 마음이 더욱 고꾸라진다. 하는 거 없이 피곤하고, 급기야 내 몸이 실제로 아픈 건 아닐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걱정 많은 내가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 오랫동안 많은 책을 보며 극복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았던 것처럼.


내 슬럼프의 시작은 이랬다. 사실 2주 전에 내가 쓴 대본에 오류가 있었는데 시청자 의견을 통해서 잘못된 것이 방송에 나간 걸 깨닫게 되었다. 몹시 괴로웠다. 이제까지 뭐 대단한 원고를 썼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방송에 대해서 적어도 떳떳했는데. 이미 방송이 나간 거라 수습하기도 힘들고. 잘못된 게 방송에 나가는 걸 조심하고 잘해왔다고 자부했는데 내 방송 경력에 마치 오점을 남기고 만 거다.


가끔 아이가 상담 선생님처럼 곧잘 내 고민을 들어주곤 하는데 이번에도 다소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꾸마 선생님, 제가 방송일에 실수한 것이 나가서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꾸마 어머님, 괜찮아요.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죠. 다음에 잘하면 돼요."


사실 장난으로 하는 거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의 조언이 마음에 와닿았고 좋았다. 아이의 말을 곱씹어 보니 평소에 내가 아이에게 한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조언인데 아이에게 다시 들으니까 그동안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내가 명쾌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내 실수를 내가 먼저 알아차리고 내 잘못을 인정하고 담당 피디에게 알렸다. 다시 보기를 내릴지 말지 피디가 결정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수습은 했고,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였다. 그리고 1년 넘게 해온 프로그램인데 실수 한 번으로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걸 딛고 앞으로 더 조심하고 잘하면 되겠다 싶었다. 다른 사람의 실수에는 어쩌면 관대했을 텐데 나는 여전히 자신에게 박했다. 종종 아이에게 하는 노랫말처럼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털어내고 가벼워질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이번 일로 우리 아이는 엄마를 들었다, 놨다 하는 귀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했던 잔소리들을 아이가 요즘 나에게 하는 게 문제지만. 


말로는 아이에게 실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이가 실수할 때마다 화를 내고 마치 협박하듯이 다시 그러지 말라고 했던 내 모습을 인정한다. 아이의 말대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다음에 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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