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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 Apr 18. 2020

'마에스트라'가 아니라, '더 컨덕터'

더 컨덕터 (2018)

내 마음이 설레는 순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오케스트라가 연주 전에 다같이 음을 조율하는 소리를 들을 때다. 음악회장에 가면 오보에가 A 소리를 길게 내는 그 순간 장내가 조용해지고, 이어 다른 악기들이 함께 소리를 맞추며 연주를 위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어 박수갈채와 함께 지휘자가 나온다. 인사를 하고, 지휘자가 두 손을 들어올리면 모든 연주자가 악기를 들어올린다. 지휘자와 함께 큰 숨을 내뱉으며, 연주가 시작된다. 지휘자가 땀을 흘릴 정도로 음악에 심취하면, 그의 감정을 전달받는 연주자들도 똑같이 그 감정에 젖는다. 그렇게 교감을 하면서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떨리는 순간을 즐길 권리는 100년 전만 해도, 남성에게만 허락됐었다. 그리고 이번에 본 영화는 그 천장을 깨부순 여성의 이야기다.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더 컨덕터"다.

"여잔 지휘 못 해. 할 수가 없어. 이끌 수가 없으니까. 여자가 손에 봉을 드고 남자들 앞에서 요란한 몸짓을 한다? 보기 흉할걸. 난 네가 예뻐보이길 바래."


지휘가 봉을 들고 하는 요란한 몸짓이라니... 이런 생각을 누가 하냐면, 큰 음악 학교의 피아노 선생님. 1926년,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불린 것과는 달리 기회가 있지 않냐는 말에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Not for Everybody."

네덜란드 출신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더치판 포스터를 가져와보았당

윌리가 가고 싶어하는 길은, 마치 이 사진처럼 모두가 등을 돌리는. 상식에 어긋난 길이었다. '상식', '지식'이 왜 권력구조와 관련있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왜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떤 편견 때문에 잘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걸까.


그 와중에 본인이 입양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윌리. 자신의 본명이 '안토니아'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네덜란드인으로서의, '안토니아'로서의, 그리고 지휘자가 되고자하는 정체성을 위해 전진하는 안토니아. 이 영화를 통해 바흐 최고 권위자였던 사람이 놀랍게도 슈바이처 의사였다는 걸 알게 됐다. 슈바이처 의사는 끊임없이 안토니아의 롤모델로서 언급된다.

본격적으로 지휘를 공부하고자 추천서를(알고보니 추천서가 아니었지만,) 받아 찾아간 선생님, 카를 무크 씨는 아주 무례한 태도로 안토니아를 거절하고 문을 쾅 닫아버린다. 그리고 그의 2층 방 창문까지 벽을 타고 올라가 외치는 안토니아.


"세계대전 때 슈바이처는 프랑스에 투옥됐었어요. 누굴 치거나 죽여서가 아니라 단순히 독일인이라는 이유에서요. 선생님도 그러실래요? 미국인이라서, 네덜란드인이라서, 아님 여자라서, 어려서, 담배를 안 피워서?"


똑똑한데 신념까지 굳으면 무시할 사람이 없다. 카를 무크는 안토니아의 논리에 설득되고, 안토니아는 그 때를 노리지 않고 쐐기를 박는다.


"슈바이처는 음악을 다음 생으로 미룰 만큼 미쳤지만, 전 음악을 위해 이번 생을 바칠 만큼 미쳤어요. 도와주시든 안 도와주시든 저는 지휘자가 될거예요."


그리고 거의 <위플래쉬>의 플래쳐 교수 느낌으로 윌리에게 묻는 카를 무크.


"그러니까 기진맥진할 준비가 됐다는거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윌리는 카를 무크가 자신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었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안토니아가 스스로 만든 기회였던 것. 겸손한 걸까, 아니면 세상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만든걸까. 둘 다라고 생각한다.

안토니아는 베를린에서 카를 무크에게 열심히 배우고 음악학교 준비까지 해서, 한 번도 여자를 뽑은 적이 없는 지휘과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지휘를 보지 않거나 따르지 않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악보를 모두 숙지한 상태에서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해야할 일은 지휘자를 따라 음악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다. 지휘자마다 추구하는 빠르기나 소리의 크기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휘자와 단원들의 케미는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런 협조를 해주지 않으니..곤혹을 겪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선생님, 카를 무크.


"백 명의 남자 앞의 여자야. 어떻게 해야 그들이 널 따라올까? 부드럽게? 아님 거칠게 다뤄야할까? 지휘할 땐 폭군이 되어야해. 민주주의론 안돼."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는 '상식' 선에서 행해진다. 더 많은 마음을 얻어야한다면 집단의 다수가 하는 생각, 그들이 원하는 것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백 명의 남자 앞에서 아무 표도 얻을 수 없는 여성이 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들의 상식을 비상식적으로 뒤엎어버리면 된다. 이 곳에서 자신이 최고 권력자 임을 선포하며, 쿠데타처럼. 정말 다행인 것은 카를 무크가 안토니아의 열정과 실력을 인정했는지,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케스트라를 설득했더니, 남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교양있는 남성 관객"들. 세계 최초의 여성 지휘자가 될 뻔했던 여자는 그런 남성들의 고함 속에 정신을 잃고 실신한다. 더 끔찍한 것은 오케스트라 공연 홍보 문구다.


'돈 많은 미망인이 남자를 찾습니다'.


당황한 그녀에게 카를 무크가 하는 말.


"그 다음은 네 차례야. 준비됐니?"

"세계 최초의 마에스트라가 등장한다."라는 카피로 홍보된 영화 "더 컨덕터". 하지만 나는 "마에스트라"라는 표현이 불편하다. 한 명의 여성이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지휘자가 됐다면 그녀는 '더 컨덕터' 그 자체일 뿐이다. 재능있는 뮤지션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은 그녀가 왜 '마에스트라'라는 호칭으로 또 다른 틀에 갇혀야 하나. 편견에 맞서기 위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계속 의식하며 여성만의 연대를 꾸리는 것이라는 게 슬프다. 평등 기회를 보장하는 공론장이라면 그런 완장은 사라져야하는데. 대체 쓸데없는 편견을 가지고는 왜...여성이 여성연대로서 튀어야만 주목받는 사회가 만들어졌는지. 정당한 기회를 얻기 위한 몸부림을 왜 억압당해야 하는지. 그게 참 별로였다.


모두 같은 '지휘자'로서의 대접을 받아야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해석하는 음악은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남성 앞에 선 여성, 첫째가 아닌 환경에서 자라온 남성, 계급이 낮은 집안, 유색인종, 조국을 잃은 실향민, 또는 그런 환경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경험을 쌓아온 모든 사람들... 그들이 느껴온 것들이 해석에 담길 테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 안토니아 브리코가 담은 그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안토니아는 때로는 비이성적인 상황에 분노했지만, 대체로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냉정함, 완고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껏 쌓아올린 음악에 대한 열정, 세상에 맞서 승리한 당당함을 음악에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부드럽게 포용한다. 그녀가 건네는 영화 속 마지막 연주, 엘가의 '사랑의 인사' 처럼.


"Music doesn't know sexes."


신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음악. 신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또는 유색인종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속단할 수는 없다. 신이 내는 목소리는 남성, 여성이 아니라 포르테, 피아노. 또는 느리거나 빠르게 나타날 뿐이다. 음악의 영역에서 음악가들이 할 일은 최고의 음악을 위해 서로의 파트를 존중하고, 조화롭게 소통하는 것 뿐이다.  성(性)이든, 계급이든. 그들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것들은 떼어놓고, 오로지 그들의 악기로서.




+) 나는 안토니아의 친구로 등장하는 로빈이 좋았다. 정확히는, 그런 든든한 친구이자 조력자를 얻은 안토니아가 부러웠다. 둘의 더도 덜도 없이 신의와 존중만 가득한 친구 관계가 참 멋졌던 그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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