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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키친anime cook Jul 06. 2023

부러져도 괜찮아

우연히 콩을 키우게 되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학교에서 강낭콩을 가져왔다. 동그랗고 납작한 플라스틱엔 젖은 휴지 같은 것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강낭콩이 서너 개 올려져 있었다. 학교 활동시간에 받은 것 같았는데 딸아이는 젖은 콩과 기록장을 내게 건네며 콩에서 뿌리가 나면 심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잘 자라고 있는 식물도 빠르게 죽이는 소문난 식물킬러였고 콩 같은 건 키울 생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아이에게 성취감 같은 걸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콩이 잘 자라도록 함께 키워보자고 했다. 며칠 동안 콩은 가져온 그 상태 그대로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끔 콩 아래에 깐 휴지가 말랐을 때 물뿌리개로 물을 조금 뿌려주는 것뿐이었다. 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나와 딸아이의 관심이 시들해지기 시작했을 쯤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콩이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한가닥 뿌리 같은 하얀 것이 콩 하나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콩엔 곰팡이로 추정되는 뭔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저 정도도 뿌리가 난 거로 쳐주는 건가 싶어 그대로 지켜보자 하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콩은 눈에 띄게 달라져있었다. 콩 껍질이 벗겨지고 떡잎이 나와있었다. 몇 시간 사이에 부쩍 달라진 콩이 신기하긴 했지만 저러다 결국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날 저녁 우리는 작은 화분에 콩을 옮겨 심게 되었다.


콩을 화분에 옮겨 심은 다음날, 부쩍 키가 자란 콩과 만나게 되었다. 이미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식물도 죽이는 내게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수시로 콩이 자라는 걸 관찰하기 시작했고 시시각각 자라나고 본잎들이 나오는 걸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 감탄도 잠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콩줄기가 너무 빠르게 자랐기 때문이었다. 진짜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키가 쑥쑥 자랐는데 어릴 때 읽은 잭과 콩나무가 생각날 정도였다. 콩이 원래는 이렇게 빠르고 길게 자라는 식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동화도 나온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집 콩은 동화 속에서 보았던 콩나무처럼 튼튼해 보이진 않았다. 우리 집 콩은 언제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줄기가 얇고 길었다. 혹여나 얇디얇은 콩줄기가 바람이라도 맞고 꺾일까 싶어 항상 조심스럽게 다루던 어느 날, 키다리 콩줄기는 딸아이의 손에 꺾이고 말았다. 물을 주려고 하다가 실수로 건드린 것 같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화분은 왜 이렇게 작단 말인가...


딸아이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콩줄기가 꺾였음을 내게 알렸다. 나는 꺾인 줄기를 잘라내면서 다시 자랄 거라고 아이를 격려해 주었다. 줄기 한가운데가 꺾였기 때문에 그 위쪽에 났던 잎들도 함께 잘려나갔고 줄기의 아랫부분과 처음 났던 잎 2장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던 콩이 자라기를 멈춘 것도 그때부터였다. 키도 더 크지 않았고 잎도 더 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 콩도 시들어버리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꼬박꼬박 물도 주고 해와 바람도 만나게 해 주면서 기다렸다.


며칠뒤, 잘라진 줄기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 다른 줄기였다. 우리 집 콩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렇게 작은 줄기와 잎을 재생산해낸 콩은 다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콩은 처음과는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처음엔 줄기가 위로만 길게 자라고 그 긴 줄기에 잎이 생기는 양상이었는데 이제는 잘린 줄기를 중심으로 옆으로 새로운 줄기가 생겨났고 새로운 줄기에 잎이나기 시작했다. 중심에 있는 줄기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 같았지만 옆으로는 풍성해지고 있었고 누가 봐도 안정적으로 자라는 것 같아 보였다.


사실 나는 잘려나간 줄기가 다시 자랄 거라고 예상했었다. 처음과 비슷한 모습으로 자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콩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창문을 열다가 콩이 심긴 화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줄기도 잎도 아닌 새로운 뭔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꽃봉오리였다. (처음엔 이게 콩깍지인 줄 알고 사진을 찾아보고 이게 맞나 호들갑을 떨었었는데 콩깍지가 맞다고 거의 확신할 때쯤 식물을 잘 아시는 지인이 이건 꽃봉오리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식물이 꽃봉오리를 내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식물알못들이 보면 영락없는 콩깍지 아님...?


나는 애초에 콩이 이렇게나 잘 자랄 줄 모르고 콩과 어울리지 않는 작은 화분에 콩을 심었었다. 키가 자랄 때도 잎이 늘어날 때도 그냥 이렇게 자라다 말 줄 알았고 언젠가는 시들해져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줄기가 꺾이던 날도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고 생각했다. 꺾인 뒤 성장을 멈춘 콩을 보며 머지않아 버려지겠구나 했었다. 그런데 꽃이라니! 이런 결론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뭔지 모를 묵직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콩이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콩에게 나를 투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찌어찌 겨우겨우 살아남은 나는 딱 우리 집에 있는 얇고 키만 큰 콩줄기 같았다. 항상 위태로웠고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휘청대는 꼴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쉬 꺾여버린 콩줄기가 마음에 쓰이기도 했지만 결국 시들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꺾인 콩줄기는 꺾여버린 현재의 나와 같아 보였다.


노력하고 나를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나를 단속해 왔다. 바람아 불어봐라 내가 꺾이나. 나는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 두려운 상황을 만나면 크게 고함을 치는 법이다. 너무 무서우니까 무섭지 않은 척하느라 그렇게 소란스럽게 하는 법이다. 꺾이면 다 끝날 것 같기 때문에 꺾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열심히 방어하고 공격하며 살다가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싶었을 때 결국 나는 꺾이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실수로도 쉬 꺾이는 콩줄기처럼 나도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꺾여버린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꺾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꺾여버린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소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지 않아 무기력했다. 여전히 열심히 아이들을 돌봤고 어느 때보다 우리 집은 더 반짝반짝 윤이 났으며 유튜브 조회수는 늘 상승 곡선이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무기력했다. 너무 열심히 살고 있어서 내가 무기력한지도 모른 채 이유 모를 우울감과 싸워가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무기력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잘 몰랐었다. 과거에도 겪었고 지금 겪고 있으며 미래에도 겪게 될 원가족과의 얽힌 고통은 항상 있었던 일이었는데 왜 요즘 유독 더 힘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집 콩은 그런 나를 교훈하듯 보기 좋게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꺾여버린 그 줄기를 버팀목으로 삼아 새로운 줄기와 잎을 내더니 결국 꽃을 피워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나는 꺾여버린 나를 꽤나 수치스러워했던 것 같다. 꺾여서 더 자라지도 못하고 새로운 줄기나 잎을 맺지 못하는 것 같은 나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바라보며, 마음에서 중요한 것을 놔버리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꺾였지만 결국 건강하게 자란 콩은 말을 걸어주었다. 꺾여버린 그곳이 결국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며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것들이 자라날 것이라고. 꺾여도 괜찮은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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