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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키친anime cook Feb 07. 2024

딜레마

지브리 영화 <추억은 방울방울>을 보다가..

타에코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타에코네 아버지는 말을 거의 안 한다.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는 항상 신문을 본다. 가족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신문을 다 보고 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밥을 달라고 요구하고 어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아버지 밥을 다시 차린다. 타에코는 뭔가가 필요하면 어머니에게 가장 처음으로 묻지만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타에코의 질문들에 어머니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연기에 재능이 있는듯한 타에코는 연극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할 수 없게 된다. 타에코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였다. 나의 진로나 나의 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가족 구성원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타에코의 아버지를 묘사한 것이긴 한데 어쩐지 익숙해 보이지 않는가? 요즘 시대 아버지들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것이 그 시대 아버지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여기서 국적이 달라 있을 법한 문화차이는 발견할 수 없다. 가부장제 속의 아버지들은 시대, 나라를 초월하여 매우 비슷했다. 


부모의 고민


가부장제라면 지긋지긋한 80년대 여성이지만 영화를 보다가 타에코의 아버지를 공감한 장면이 있었다. 타에코가 에나멜 가방을 새로 사고 싶어 투정을 부리는 장면이었는데 (막내였기 때문에 보통 이런 식으로 투정을 부리고 부모님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경험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때 아버지는 타에코의 투정을 들으며 문 밖에 한참을 서 있는다. 나는 아주 짧게 지나간 그 장면에서 아버지의 여러 가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타에코가 막내라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걸까? 가방 그까짓 거 그냥 사주고 싶은데 사줄까? 지금 가방을 사준다고 하면 나중에 원하는 게 생겼을 때 또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려나?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해야 타에코의 고집도 꺾고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을까? 


타에코의 고집스러운 투정을 들으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아버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타에코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그냥 두고 나가자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후에 나오는 타에코를 때리는 장면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기다림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에 한참 남아있었다. 저렇게나 무뚝뚝하고 가부장제로 똘똘 뭉친 타에코의 아버지도 자신의 자녀를 깊게 사랑하여 제대로 자라주기를 기대하면서 아이를 훈육했구나. 비록 잘못된 행동으로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긴 했지만 매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민했구나. 이 마음이 너무나 느껴져서였을까. 그리 좋은 아버지는 아닌 것 같은 인물에게 이토록 마음이 동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자녀의 고민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꽤나 귀여워하는 아버지가 내게 처음으로 손을 댔다. 이걸 경험한 타에코는 아마도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센(?) 힘을 가진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는 사실은 나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부모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경험이었다. 어린 타에코는 거기서 아버지의 사랑이나 고민 같은 걸 알아챌 수 있었을까? 알아채기는커녕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자신이 괜한 고집을 부렸었다는 사실은 잊히고 아버지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과 그 감정만이 남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행동이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속에서는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타에코의 고민이 깊어졌다. 아버지의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됐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사랑이 아니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이걸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자꾸 속에서 오류가 난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딜레마


그 일 이후 아버지는 타에코를 절대로 때리지 않는다. 아버지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했고 후회했던 것 같다. 한동안 자신의 행동을 상기하며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타에코는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도 그때 그 일을 잊을 수없다. 처음 시작은 나의 잘못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그렇게 맞을 일인가도 싶다. 자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야만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아버지의 행동의 합리화시키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진짜 아버지가 이해가 되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내가 상처를 덜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결혼을 하고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입장의 감정이 뒤엉키는 시기를 언젠가는 겪는다. 자녀였을 때의 입장과 부모였을 때의 입장을 모두 겪어보니 타에코도 타에코의 아버지도 십분 이해가 된다. 부모 입장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자녀 입장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대체 누가 잘못한 것일까. 우리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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