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서의 첫여름휴가.
프리랜서 직업은 딱히 휴가란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휴가를 쓸 수 있다. 들어오는 번역 의뢰를 고사하면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나는 휴가를 위해서가 아닌 여러 이유로 고사를 했다. 하지만, 그 후의 찜찜함과 잘한 선택인가라는 쓸데없는 고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브런치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번역할 의지도, 글을 쓸 힘도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말대로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빨리 회복을 했고 해야 할 일들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자꾸 누우려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 그러한 환경을 나 스스로 만들기도 하면서.
근 1년이라는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나의 원칙은 무리한 번역은 하지 않겠다는 것. 누가 들으면 어이없어할 이 생활을 1년 가까이하면서 나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물론, 무리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받은 번역을 하다 보면 생각지 않게 시간이 많이 걸려 며칠 꼬박 10시간이 넘게 하기도 하면서 토 나올 경험도 있었지만 이런 경험은 짧고 굵었고 빈도가 잦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끝내고 나서 희열은 있다. 그 쾌감은 기분 좋은 쾌감이다. 이젠 실컷 놀고 쉬어도 자책감이 들지 않고 마땅히 쉬어야 한다는 휴가 확인증을 받은 느낌?
내 노동에 대한 사기를 톡톡히 당하고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몇 건의 번역 의뢰를 고사하고 나니 갑자기 긴 휴가가 주어졌다. 번역 커뮤니티에선 7~8월과 12~1월은 비수기라고 하던데. 난 사실 비수기, 성수기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잘 나가는 번역가는 분명 지금도 끝없는 번역 의뢰를 받고 번역하느라 정신없을 테니. 이런 세상이 바로 자본주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불편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과연 나는 프리랜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초심자의 행운'처럼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1년은 내게 행운이었을까? 사실, 이력서를 넣자마자 샘플테스트를 통과하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일 또한 나의 스피도와 생활에 맞게 적절히 주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빨리 설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많은 돈을 원하지 않았고 나 혼자 쓰고 조금 저금을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장기적(?)으로 일을 안 한건 이번이 처음이다. 불안감에 휩싸인다. 앞으로 나의 진로는? 출판번역은 계속 공부를 하고 도전할 것인가? 나는 내가 잘하지도 못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가? 번역도 전문 분야가 있는데 궁금한 의료번역을 공부해 볼 것인가?
사실 언뜻언뜻 생각나는 이러한 질문에 심도 있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도 말고 있어 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고 항상 머리가 복잡할 때 그렇듯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번 여름휴가는 책을 읽자. 오로지 책만 읽자. 그렇게 꺼내든 책이 "마의 산"이다. 언제 샀는지 기억은 없다. 아마 10년 전? 이 책을 고이 모셔둔 건 당시 회사를 다니면서 여름휴가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책을 완독 해야지 했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여름휴가도 이 책에 손대지 못했고 워터 파크, 계곡 등 어딜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올여름, 어딜 가기도 찝찝한 시기다. 고 3인 아들 녀석을 두고도, 데리고도 갈 수 없는 여름방학. 이미 아이는 개학을 해버렸지만 이번 8월은 책을 읽자. 그동안 내가 벌여놓은 일들은 해 나가면서 책만 읽자고 마음먹었다. 그 외는 모두 미루기로.
나는 언제난 책을 하나만 읽지 않는다. 보통 많게는 5~6권. 지금은 이 여름휴가용으로 집어든 '마의 산', 대중교통등 이동 시 읽는 '니체의 지혜', 윤독모임으로 읽고 있는 '총균쇠', 원서로 일고 있는 '파친코'. 총 4권이구나.
2023년 그 어느 때보다 더운 여름, 마의 산과 함께 이 더위를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