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처한 간병인, 엄마 미안
어린 시절 친정엄마는 유달리 건강하셨다. 거기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 하루에 3번은 집을 쓸고 닦으셨다. 성격도 급해 집안일을 미루지 못했고,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빨래든 설거지든 집안일을 바로바로 하셨다. 젊었을 때 본인의 몸만 믿고, 내가 아이를 낳고도 선뜻 외손자를 보신다고 하시고 독박 육아를 나 대신하셨다. 그렇게 외손자를 보면서도 집안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도 화장실 청소는 물론 온갖 집안일에, 거기다 딸 집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오셔서 집 청소를 하고 반찬을 주시고 가셨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던 엄마에게 당연히 몸은 이상 신호를 보냈다. 엄마는 양쪽 무릎을 수술하셨고, 아이는 21개월에 어린이집으로 보내져야 했다. 다행히 아이는 적응을 잘했고, 너무나도 운 좋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 컸다. 당시 엄마가 무릎을 수술하실 때, 나는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수술 당일 점심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어 갔었고, 그 이후로는 주말을 이용해 잠시 얼굴을 비추는 문병을 갔다. 수술 후 간병인이 필요했던 일주일간 엄마는 간병인을 쓰셨다.
그리고, 최근 2년 전에 엄마는 어깨 수술을 하셨다. 이 때는 내가 회사를 관두고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어서 수술 당일 내내 병원에 있었고 수술실 들어가기 전 엄마, 수술실을 나와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을 온전히 다 봤다. 한쪽 어깨 수술이라 간병인이 필요치 않다고 판단한 엄마는 나에게 이틀에 한번 머리 좀 감겨 달라고 하셨고 나는 그렇게 이틀에 한번 엄마의 머리를 감겨드리러 병원에 갔었다. 병원에서도 엄마는 괜스레 주차비 많이 나온다면 한 시간이 못되어 가라고 항상 등을 떠미셨다.
최근 나에게 이런 옛일들을 돌이켜 볼 일이 생겼다.
2023년 1월 설 명절.
시댁에 갔던 나는 시어머니의 여동생이 수술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어머니에게는 여동생 두 분과 남동생 한 분이 계신데 바로 아래 동생이 서울에서 수술을 하신다고 했다. 나는 그 이모님을 좋아한다. 평생 홀로 계셨던 그 이모님은 남편과 결혼 얘기가 오갈 때 아버님과 어머님을 뵙기 전에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렸던 분이셨고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셨기에 나는 그 이모님을 좋아했다. 하지만 살면서, 얼굴 뵐 일이 많지 않았고 생각해 보니 최근 3년간은 뵙지도 못한 거 같다.
여하튼 그런 시이모님이 수술하신다는 말에 나는 선뜻 간병인을 자초하고 나섰다. 이미 그 이모님은 아래 여동생이 간병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 손이 모자라면 돕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모님께도 전화를 드려 내 맘을 전했다.
그렇게 한 달이 넘게 시간이 흘렀고, 아무런 소식도 없어 난 잊고 있었다.
3월 2일. 갑자기 시이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곤, 첫 말씀이 네 신세를 좀 져야겠다며 PCR 검사를 보건소에 가서 받아야 하고, 올라가는 KTX 시간과 내려오는 시간을 줄줄이 말씀하셨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이모님 말씀, 시술 다음날 중환자실을 하루 들어갔다가 그다음 날 일반실을 내려오니 시술 당일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그리고 챙겨 와야 할 짐들, 등등을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멘붕이었다.
사실 나는 여기까지 생각을 못했다. 생각이 짧았다. 나는 동생분이 며칠을 하면 2~3일 정도 올라가서 도와드릴 마음이었지 이렇게 처음부터 시술 전날 모시고 올라가 퇴원까지 책임 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왜 그 일을 내가 하냐고, 시어머님도 아닌 시이모님 간병은 첨 듣는다고, 요새 자식도 안 하려고 해서 간병인 쓰는 마당에 시조카에게 부탁을 하다니, 등등... 머리가 복잡했다.
원래 병간호를 하시기로 했던 그 아래 동생 이모님이 손자들을 봐주고 계신데 아이들이 아프고 이래저래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 곧장 이 소식을 들으셨는지 시어머니도 전화가 오셔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 무엇보다 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심장이 두근거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엇보다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단 하루도 병원에서 잔 적이 없는 내가 시이모님의 간병인이라니. 결론은 내 생각이 짧았다. 내가 2~3일을 생각했다면 당시에 정확하게 날짜를 말했어야 했는데 며칠 도와드릴 수 있다는 말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입원부터 퇴원까지 다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난 무슨 맘으로 그런 말을 뱉었을까. 나는 더 이상 직장인도 아니고 번역을 한다고 하지만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일(물론, 일거리가 들어올 땐 달라지지만)을 하다 보니 그런 말을 뱉었을 거다. 막상 일이 이렇게 터지고 나니 일주일간 번역일을 하지도 못하구나 싶고, 오만가지 걱정거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내 어깨. 왼쪽 어깨는 회전근개파열. 3년 전 MRI를 찍었을 때 20~25% 파열이라 아직 수술은 아니지만 잘 관리를 하라고 했고, 작년부터는 오른쪽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겼단다. 작년 11월에 5번의 주사를 맞고 도수 치료를 했다. 그런 어깨가 2월부터 다시 아팠다. 1월에 도와드리겠다는 말을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지금에서야 내 어깨를 들먹이며 거절할 순 없다. 어깨 아픈 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프면 나만 고생. 어제 바로 병원에 갔다. 다시 주사를 맞고 충격파 치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시이모님께 전화가 왔다.
그리고, 희소식. 도저히 나를 데리고 가서는 안 되겠단다. 시술 당일 짐을 다 빼야 하는데 내가 이모님 이불을 비롯 옷, 이런저런 짐에, 내 이불을 비롯한 짐들을 어떻게 들고 다닐 것이냐는 것이다.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지방 사람들 불편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입원실을 하루 비워야 한단다. 그렇게 하여 나는 올라가지 않고 다시 여동생분이 올라가기로 하셨다는 거.
난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머지 치료를 받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누군가를 도울 때는 말을 더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것과 친정엄마에게 정말 잘하자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엄마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정했다. 다시는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고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날까지 잘하도록 노오력하자!
그리고, 나를 아끼자. 근 20년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고, 거기다 나는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고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계속하려면 무엇보다 나를 아끼자. 나는 직장인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번역이라는 일이 있다. 당당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