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끼 Aug 23. 2020

파스타는 죄가 없다

소개팅을 하게 되는 루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친구, 직장 동료, 가족이 소개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중 가족이 해주는 소개팅이라면 소개팅이라기보다는 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나도 선을 본 일이 있는데,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하는 스타일은 아니시지만 두어 번 주변을 통해 사람들을 소개해 주셔서 였다.


이번에 들어온 선 자리는, 엄마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들인데 좋은 학교를 나와서 연구소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결국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남자의 부모님이 부자라서 잘 되면 좋을 거라고 소개받았다고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서 남자를 만나는 것에 그다지 흥미는 없었지만 엄마가 한번 보기를 간절히 바라셔서 그래, 한번 만나보자, 하고 소개팅을 하겠다고 했다.


남자분에게서 먼저 문자가 왔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데 쎄한 느낌이 왔다. 음, 왠지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무튼 그랬다.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 느낌을 눌렀다.


그리고 약속 당일, 남자분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식당 입구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키는 좀 컸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빛이 불안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지나간 느낌이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파스타를 주문했다. 내가 시킨 것은 안심 크림 파스타였다. 남자는 리소토를 시키고 샐러드도 주문했다. 그리고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는데, 나는 직장과 학교 정도를 이야기하고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남자분이, 자기가 우울증이 있어 약을 먹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소개팅 상대에게 처음 만난 날에 이야기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싶었지만 그냥 솔직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 남자분이,


전 남자를 좋아해요.


하고 말했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렇게 까지 이야기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기분이 나빠졌다. 맘에 안 든다고 해서 그런 거짓말을 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자길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남자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등학교 때 성적 정체성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아무도 이런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도 알고 있는데 선 자리에 나가면 오피스텔을 한 채 사준다고 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맘에 안 들어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저렇게 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짓말 일리 없었다.


남자는 내 속도 모르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에도 어머니 소개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자기는 주로 어플을 이용해서 남자들을 만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사용하는 어플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보여줄 필요는 없는데! ) 남자가 하는 이야기가 주변 테이블에 들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되었다. 저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적 소수자들에게 별 다른 감정은 없다. 그들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이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이 자리는 분명 서로 이성애를 전제를 하고 만나는 자리였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사기, 혹은 기만이 아닌가?


지금 여기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그런데 도저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릴 수가 없었다. 엄마의 아는 사람이 들을 이야기가, 그리고 엄마가 듣게 될 이야기가 걱정되었다. 앞의 이야기는 쏙 빼고 예의 없이 여자가 갑자기 가버렸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적당히 맞춰주고 밥은 먹고 가자, 하고 마음을 다 잡았다.


파스타는 죄가 없다.  (예전에 독일에서 먹은 까르보나라.)

남자가 우울증에 걸릴 만하다 싶어 좀 측은하기도 했다. 엄마가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결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말이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문제인 사람은 저 남자의 어머니가 아닌가 싶었다. 아들의 성적 정체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아들과의 선을 주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남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 소개팅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좋았겠지만, 모자의 만행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엄마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 집 아들이 네가 마음에 든다고 같이 영화 보고 싶다는데 어때?"


응? (정말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엄마는 한번 더 보면 어떨까 싶은데, "


아아, 더 이상 그 남자를 위한 예의 따위는 없다. 나는 엄마에게 그 남자가 한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았다. 좁은 지역 사회에서 소문이 나는 것을 막아주고 싶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엄마는 정말 놀라서, 이전까지 내가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엄마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러 내 방을 나갔다.


그 뒤에 엄마의 아는 사람이 그 남자의 엄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마의 결혼 재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엄마의 걱정이, 내 소개팅 상대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한 가지 더 늘긴 했지만.

작가의 이전글 내 삶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