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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연 Oct 28. 2019

아일랜드 한인 변호사 1호의 세상 사는 이야기

제1화 - 당신은 할 수 없어요

"당신한텐 이게 아마 무리일 거요"

"왜요?"

"이 시험은 영어의 마술사가 치는 것이오. 한데 당신은 외국 태생이고 그러니 영어도 당연히 모국어가 아니지 않소?"

"사실이긴한테, 난 얼마 전에 영국 법대 졸업장도 취득했어요. 당연히 그 과정도 영어로 했는데.. 이제 와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시험이 무리라는 것은 또 뭐죠?"

"이 시험은 영어가 모국어인 이곳 법대 졸업생들도 헤매는 힘든 시험이죠. 일단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장황하고 복잡하게 늘어진 가상 상황을 속독하고 이를 배경으로 낸 법률문제를 읽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뒤, 이에 상응하는 답을 5가지 중에서 정답을 신속히 찾아내야 하오. 모두 정답 같아 보이고 종종, 틀린 답이 더 정답 같기 때문에, 응시자가 법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혼동이 오도록 계산된 문제와 답안지이죠. 속독을 한다고 해도 두 번 읽을 시간이 없소. 그러니, 모든 것을 한 번만 읽어 내려가면서도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하는데, 법에 대한 지식 외에도 영어 독해력이 마술사 수준이 되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오.."


이렇게 말을 끝낸후에 자신을 올리버라고 부르라는 덩치 큰 아일랜드 변호사는 책상 위에 있는 사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책상 건네 편에 앉은 나는 그 사진이 무엇을 담은 사진인지 볼 수 없었지만, 여태 굳었던 표정이 잠시 풀리는 것을 보고 가족사진일 것이라 추측을 했다. 그의 왼손에는 노란 금가락지가 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버는 액자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난 그저 당신이 헛된 노력과 함께 돈을 낭비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는 없소. 솔직하게 말하는 거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책상 가장자리에 살짝 걸터앉아 두 손의 손가락을 탑을 쌓듯 모은 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표정 속에는 '내가 이렇게 정직하게 상담인들을 상대하오' 하는 자신에 대한 흡족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난 주저 없이 단숨에 말했다.

"내 돈이고 내 시간입니다. 난 나의 능력을 알아요. 그래서 내가 이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등록을 해 주세요"

나는 이 짧은 대답을 단어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하듯이 일부러 천천히 포인트를 눌러 가며 말했다. 당연히 이 말을 하는 내 얼굴에는 내 결정의 심각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는 심리상태에  걸맞은 표정을 걸치고서 말이다.

올리버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 약간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더니 두 손을 책상 위에 펼 쳐놓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중간에서 포기를 하게 된다고 해도 나를 절대 원망해서는 아니 되오. 난 이미 충분히 언질을 주었다고 생각하오."

"물론입니다. 내가 도전하는 거예요. 그러니 중간에서 포기를 하게 되거나 시험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 도전과 실패일 테니까요"

이렇게 하여 나는 만 38세의 나이로 뒤늦게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 준비 관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사업을 하던 아일랜드인  남편과 당시 초. 중학생이었던 세 아들을 거두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만 하는 그러한 생활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나와 상담을 한 올리버는 당시 프라이어리 로 (Friary Law)라는 법인을 통하여, 아일랜드에서도 뉴욕주와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따려는 아일랜드 법대 졸업생들과 법조인들을 위한 주말 강의를 진행하던 사람이다. 그와의 긴장된 첫 만남 후에 나는 10월에 시작하는 준비반에 등록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위치한 UCD (University College Dublin) 이란 대학 법학부에서 주말마다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시험 준비를 위한 강의를 듣는 것이다. 등록 후, 나는 다음 해 2월에 있을 뉴욕 변호사 시험 준비에 올인을 했다. 


그 당시에는 다니던 직장도 일찌감치 그만두고 집과 아이들에게만 매달리던 전업 주부였는데, 사업을 하는 남편 출근 뒤, 그리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난 후에 다시 집에 와서, 집안일을 정리하고는 시험공부에 들어가는 것이 나의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시험공부는 너무 재미가 있었다. 책을 잡고 있으면 한두 시간이 뚝딱 흘러도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깨어날 수가 없었다. 남들에 비해 비교적 뒤늦게 시작한 법 공부와 변호사 시험공부에 재미가 들려 그야말로 나는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무슨 공부를 저렇게 재밌게 해?' 하는 듯 남편도 그러한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내 차 안에는 항상 시험 준비책으로 가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과외활동장에서 기다릴 때, 학교 앞 주차장에서 기다릴 때, 단 1, 2분도 나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적이 없는듯하다. 늘 손에 책과 볼펜을 쥐고 있어서, 학교의 아일랜드 엄마들은 이제 나를 공부하는 엄마로 지칭할 정도였다. 이러한 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변비기가 있었던 나는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남들에 비해 조금 길었다. 그러니 변기에 앉자마자 책을 잡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그 책을 늘 읽던 시사 책에서 법률책으로 교체만 해준 셈이 된 것이다. 남편도 뒤늦게 시작한 나의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응원해주고 도와주었다. 주말이면 내가 혼자 조용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항상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집안일도 시간 나는 대로 거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뉴욕주 시험은 일 년에 두 번, 2월과 7월에 있는데, 나는 10월에 준비반에 등록을 하였으니, 돌아오는 해의 2월(2005년)에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남편은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공부한 뒤 시험을 치르라는 취지에서 7월 시험에 응시할 것을 조언하였으나, 나는 스스로가 7월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하루빨리 시험을 보고 싶었다. 뒤늦게 시작한 법 공부이니 만큼,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2월 시험에 응시를 하였고, 시험날짜 6일 전에 나는 남편과 함께 내 생애 처음으로, 미국 땅, 그것도 뉴욕 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초. 중학생이던 아이들은 시보모에게 맡겨놓았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뉴욕의 JFK 공항까지는 약 6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JFK 공항에 내렸을 때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후졌다'였다. 영화에서만 보던 공항, 소설 등 글을 통해서 알게 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공항인데, 현실은 낡고 초라함 그 자체였다. 뉴욕 자체도 영화 같지 많은 않았다. 2월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춥고 축축한 2월의 밤에 맨해튼 구석구석에서 노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이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는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남편이 예약해놓았던 맨해튼에 있는 호텔로 갔다. 외국 응시자라도 아일랜드 응시자이기 때문에 나는 알바니가 아닌 맨해튼의 저비스 컨벤션 센터에서 미국 토박이들과 함께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위 올리버의 '백'  덕택에 아일랜드 응시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시험을 치를 '특권' 이 쥐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 숙소도 맨해튼에 잡게 된 것이다. 근데 호텔 위치가 조금 이상했다. 호텔 선택을 남편이 했는데, 뉴욕이 처음이기는 남편도 마찬가지라 그 사람 역시 어디가 적당한 곳인지 별로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예약한 호텔이 바로 타임스 스퀘어에 있는 W 호텔이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시험을 봐야 하는 내입장을 고려해서 좋은 호텔을 예약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브랜드가 확실한 호텔을 찾다 보니 W 호텔이 나왔고, 마침 또 5성급이라고는 하나, 비가 줄줄 내리는 2월이라는 비수기여서, 가격도 적당히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 으로서는 이를 일부러 비켜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좋은 호텔인데 왜 문제가 되었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는 24시간 잠을 자지 않는 곳으로 유명한 곳임을 우리는 호텔에 투숙하고 나서 알았기 때문이다. 변호사 시험을 치러 유럽에서 6시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을 비행기로 날아와서 여독과 시차 적응이란 문제도 있는데, 호텔 주변의 쿵작 쿵작 24시간 소음까지 더해져서, 막바지 시험공부는커녕 도저히 잠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서 가뜩이나 예민해진 내 신경은 이미 극도로 민감해 져 있었다. 그런데 시차 적응도 안되고 소음 때문에 잠을 잘래야 잘 수가 없었다. 호텔 주변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듯한 소음이, 자동차 경적 소리,  관광객들의 소음과 함께 어우러져 단 한순간도 평화롭지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잠을 자야 머리가 맑아질 테고, 머리가 맑아져야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히기 시작해서, 잠을 자기 위한 필사적 전투에 들어갔다. 호텔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남편이 다시 다른 호텔을 찾자는 제안도 했지만, 이제 와서 짐을 옮기고 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쌓일 것 같았고, 맨해튼 어디던지 조용할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편의 호텔을 옮기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믿는다. 하나 그때로선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나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귀막이는 물론이고, 잠을 유도할 수 있다는 별의별 차를 마시기 시작했지만, 잠을 자려고 할수록, 잠은 내게서 더 멀리 도망을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험공부는 아예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지새운 첫 3일 밤. 시험 첫날 전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초조했다. 말 그대로 돌아버릴 듯했다. 호텔방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안 올 잠을 청하려고 또 하룻밤을 전쟁터처럼 보내지 말고, 그냥 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야식도 먹고, 여기에 그냥 관광 온 사람들처럼, 맨해튼 구경도 하고 그러자. 그러면, 당신이 시험에 떨어진다고 해도, 뉴욕 관광은 한 셈이 되잖아, 안 그래? 시험이야 이번에 떨어지면 7월에 다시 도전하면 되잖아.."

나는 그저 힘없이 고개만 끄덕인 체, 남편이 이끄는 대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밤 10시경이었지만 타임스 스퀘어는 시간을 잊은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 인가도 정하지 않고 그저 군중들이 가는 대로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 10 분 정도를 걷다가, 2월의 습한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예쁜 야외 전등이 반짝이는 이탈리안 식당으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저녁을 상당히 일찍 먹은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다시 허기가 돌았었다. 다행히도 그 시간에도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고 해서 우리는 창가에 있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시험 전날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인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남편을 따라 와인을 주문하고 있었다. 


시험 전날이라는 긴장감과 나흘 동안 시달린 불면증의 조화가 뜻밖의 현상을 자아내는 듯 갑자기 술이 당겼다. 그렇게 재빠르게 넘겨버린 와인 두 잔 후에 그동안 경직되어있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까짓것, 내일 시험을 죽 쑨다고 해도 그렇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남편 말대로, 시험에 떨어지면 7월에 다시 뉴욕에 와서 도전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 당돌할 정도로 당차게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졌고, 그동안 경직되었던 나 자신이 한심하여 웃음 조차 튀어나왔다. 이렇게 남편과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40대 백인 커플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남편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남편이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이라고 하자,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엔 내게 질문이 떨어졌다. 나에게도 어디서 왔냐는 것이다. 내가 같이 남편과 아일랜드에서 왔다고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던 듯하다. 하긴, 우리가 부부 사이인 것도 몰랐을 테니..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재빠르게 내가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어디서 오셨나요?"

그러자 커플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여자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물론 여기 미국이지요. 우린 미국 사람들이에요"

여자의 목소리엔 약간의 자제된 짜증이 묻어났다. 왜 그렇게 뻔한 질문을 하느냐고 하는 듯했다.

"그래요? 아, 난 다른 뜻이 없고, 그냥 여기서 사는 모든 미국인들이 다 어디로부터 왔기 때문에 물어본 것 일뿐 이예요. 당신들이 아니라면, 당신들 조상이 어디로부터 왔겠죠. 물론 원래부터 여기에 있던 네이티브(원주민)만  제외하고 말이에요"

나는 이 말을 마치며, 그 커플 에게 윙크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백인 커플은 할 말을 잊은 듯이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실례합니다 라고 짧게 말한 후 다시 음식에 눈을 돌렸다. 타인에게 무례한 것을 질색하는 남편도 놀란 듯이 나를 큰 눈을 뜨고 쳐다봤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나는 내가 왜 그 커플에게 그렇게 쏘아붙였는지 모른다. 아마도 불면증 환자가 급하게 들이켠 와인 때문이란 생각만 들뿐..


그렇게 식사와 와인을 한 후에 우리는 다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들아 오니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그날 밤도 쪽잠을 잤다. 뒤척이다가 여기서 20분, 저기서 30분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새벽 5시쯤엔 완전히 잠이 달아났다. 눈이 떠진 후에도 나는 계속 밖의 소음을 들으며 뒤척이다가 6시경에 일어난 것 같다.

일어나 욕실에 가서 환한 불을 켜고 거울을 무심코 들여다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란 것을 지르게 되었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무시 무시한 얼굴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내 얼굴이었다. 잠을 못 잔 결과로 내 눈의 흰자위가 글자 그대로 피로 물들어 있었다. 두 눈이 검은 동공을 제외하고는 새빨간 색깔로 꽉 차있었다. 나는 인간의 눈이 그렇게 피 색깔로 물들 수 있다는 것을 내 눈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깨어난 남편은 비몽 사몽 목욕실로 들어왔다. 환한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빨간 눈을 보더니 그도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신기하다는 듯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가자. 당신 그런 상태로 시험은커녕, 사람들이 시험장에도 못 들어가게 할 거야. 그냥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렇게 못해. 지난 10월부터 당신과 아이들 챙기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노력을 쏟아부은 것 이라고는 이 시험 준비 공부밖에 없었어. 비행기, 호텔 등 경비도 많이 지출했고, 당신도 나 때문에 거의 1 주일 간 시간을 냈어야 했잖아. 그런데,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말자고? 안돼. 난 시험장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시험을 볼 거야. 떨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볼게"

당연히 난 그날 아침에 맨해튼에 있는 쟈비스 컨벤션 센타라는 시험장으로 향했다. 남편도 동행을 했다.  나를 시험장에 넣어 주고는 점심시간에 다시 로비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난 그날 내가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확실하게 나는 게 있다면, 오전 시험 중에 뉴욕주 법률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것이 있었는데, 시험 도중에 자꾸 졸음이 와서, 그 졸음을 쫓기 위해 나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었던 것이다. 이는 후에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때 내가 그랬던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 이기도 하다.  그 외에는 가물가물하다. 암튼 첫날 오전 시험을 좀비처럼 치르고 로비로 나오니, 남편이 맨해튼의 한인타운에 가서 사 온 김밥과 비타민 물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것을 기억한다.


뉴욕에 온 지 처음으로 나는 그날 밤에 잠 같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시험 첫날을 치른 후에 긴장이 풀린 것 이리라. 평소에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숨도 새근새근 자는 내가, 그날 밤은 코까지 골더란다. 그렇게 자고 나니까, 다음날인 시험 둘째 날은 몸과 머리가 개운한 게 날아갈 듯싶었다. 당연히 나는 둘째 날 시험을 잘 치렀다. 


이렇듯 나는 4일간 한숨도 깊이 못 자고 뉴욕 변호사 시험을 치렀는데, 다행히도 시험 이틀 날은 내 능력대로 시험을 봤다는 느낌에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시커멓게 멍든 내 오른쪽 허벅지는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며칠 후에 발견을 했다. 그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험 결과는 그해 5월에 발표가 되었다. 합격이었다. 


시험 결과가 발표 난 후 약 한 달 후,  아일랜드에서 뉴욕.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 준비 코스를 운영하던 올리버는 2월 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축하 저녁 행사를 준비해줬다. 뉴욕으로 시험 보러 간 45명 중 약 12명가량이 합격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중 예. 일곱 명 정도가 저녁에 나왔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더블린 시내에 자리한 Peplos라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나는 당연히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유일한 합격자였던 것이다.  난 특별히 올리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에서 나는 그가  상담 날 첫날 그의 사무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고대로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당신은 할 수 없어요'라고 했던 그에게 나는 축하주 한잔을 했음을 핑계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올리버, 당신이 나한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우리 한국인들의 기질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한다면 하는 사람들 이거든요"

당연히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깨닫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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