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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Sep 21. 2022

수통골에 잘 오셨습니다.

: 당분간 수통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오전,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계룡산 자락인 수통골이 있다. 계곡을 따라 잘 정비된 등산로는 평지에 가까워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 참고로 필자는 저질 체력이다. 다리에 쥐가 자주 나는 편이라 등산을 즐겨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일찍이 산에 오르는 기쁨을 알게 되어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무등산, 월출산, 내장산 등 국립공원의 주요 봉우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산들에 오른 경험이 여럿 있음을 밝혀 둔다. 만약 당신이 산을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 공감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수통골탐방지원센터에서 수통 폭포 가는 길


 '수통골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수통 폭포'를 지나 1.7km 구간을 다녀오는데(왕복 3.4km) 50분이면 충분하다. 당초 계획은 '계룡 12-22' 지점까지 가서 되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가을 날씨가 문제였다. 햇볕은 눈부시고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선선한 것이, 자꾸 걷고 싶었다. 얼어 죽을 놈의 호기심도 발동했다. '금수봉'에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탐방로를 살폈다. '계룡 12-22' 지점에서 '금수봉 삼거리'까지 0.9km 구간의 난이도가 '어려움'이었으나, 그리 길지 않은 구간이니 괜찮겠다 싶었다.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0.9km 지옥의 길에 발을 들였다.

   문제는 등산화만 신었을 뿐이지, 스틱이 없었다는 사실! 0.9km 지옥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경사가 45도는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계단으로 정비가 되어 있는 구간은 좋은 길이었고, 대부분 바위산을 맨손으로 등반하는 기분이었다.  손을 사용해  발로 기어오르다시피 올랐다. 오르다 지치면 손으로 짚고 오르려던 바위 위에 그대로 뒤돌아 앉았다. 다시 바위를 붙잡고 올랐다. 꼬박  시간을 기어 올라갔다. 처음 1/3 '설마 계속 이런 오르막이겠어?'라는 생각에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나머지 2/3 올라온 길로 차마 내려갈  없어서 어쩔  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기어오르는  가능했지만,  가파른 바위산을 맨손으로 내려갈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왼쪽) 쉬운 길, 계단이 있는 길은 엄청 쉬운 길에 속한다 / (오른쪽) 돌 길, 네 발로 기어 올라가는 구간



 가까스로 '금수봉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아침에 집에서 먹고 나온 사과 반 쪽과 빅파이 과자 두 개의 칼로리는 이미 다 썼고, 내게 남은 건 등산로 입구 자판기에서 뽑아온 이온 음료 한 캔이 전부였다. '금수봉'을 지나 '수통골 탐방지원센터'까지 내려갈 길은 올라온 길보다 더 멀었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금수봉'에 도착해 마셔야지 생각했던 음료수를 '금수봉 삼거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이제 이온 음료로부터 얻은 65kcal로 산 아래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제야 초코바 하나 없이 산을 오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했다. 물론 비상시에는 내 몸 여기저기에 비축해둔 지방을 태울 테지만...

 


'금수봉'을 지나 '성북동 삼거리'에서 '수통 폭포'쪽으로 산을 내려왔다. 입산을 한 지 3시간 30분 만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 스틱 대신 짚고 내려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조난신고를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탐방 전 알림 사항을 발견했다.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은 죄로 혹독한 산행을 했다.

국립공원 홈페이지(www.knps.or.kr)에 수통골(계룡산) 탐방로 구간별 정보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잠깐 머리를 식히러 나갔던 산책길은 3시간 30분의 고행길이 되어 끝이 났다. 일찍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집중해서 일하자던 계획도 어긋났다.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 하나로 허기를 채우고(힘이 다 빠져서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저녁까지 아프다고 징징대는 두 다리를 질질 끌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래도 만 오천 보를 걸어서 만날 수 있었던 멋진 풍경만큼은 좋았다.


 힘든 하루를 보냈다. 0.9km 지옥의 구간에서 되돌아 내려갈 수 없어 앞으로 계속 올라가야 했던 심정을 기억한다. 처음부터 굳이 가지 않았다면 고생하지 않았을 길에 발을 들인 순간의 마음을 이해한다. 천천히 한 걸음씩 가면 될 거란 믿음으로 내디딘 만 오천 보의 걸음을 다시 헤아린다. 결국 나는 무사히 산행을 마쳤고, 지금은 이렇게 멋진 풍경 사진을 보며 '그래도 가 보길 잘했다.' 생각한다. 내 선택에 만족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또한 그렇다.

 어디까지 오르막길일까, 끝이 안 보이는 오르막길에서 자주 지치고 주저앉는다. 너무 자주 쉬어도 힘이 빠지고, 쉬지 않고 오르려고 안감힘을 쓰면 몸이 다친다. 적당한 내 속도를 찾아 꾸준히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돌부리에 걸리지 않도록,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밑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산에 올라야 볼 수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을 놓칠 수는 없다. 혹여 반드시 갖춰야 할 장비가 없어서 이렇게 힘이 들지도 모르겠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이 걸음들을 헤아리며 잘했다 생각하게 될 날이 오겠지?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르는 걸까?

 내 친구는 "다시 내려올 걸, 왜 힘들게 올라가?"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산을 오르면서 흘리는 땀과, 산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서 느끼는 기분은 뭐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음에도 고된 산행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다시 산을 오르게 만드는 무언가다. 나는 그것이 좋다. 다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자주 즐기지 못할 뿐이다. 아마도 내일은 걸음을 걷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수통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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