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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Jul 04. 2022

"저는 산모기 전문가입니다"

(방송국에 살다보면)

주말 근무하며 사랑벌레가 수도권 서북부를 까맣게 뒤덮었다는 뉴스를 접하니 오래 전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5년차쯤 됐을까? 지금 같은 초여름, 사회부 주말 근무를 하던 중이었는데 모기가 예년보다 빨리 증가했다는 이야기를 저녁 뉴스용으로 만들라는 총을 맞았다. (누군가는 해야겠지만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닌데 굳이 내가 하게 되는 경우를 뜻하는 업계 은어)

여기저기 다니며 모기를 찍고, 모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는, 그래서 모기라면 치를 떨며 눈빛이 돌변하는 몇몇 사람을 인터뷰했다. 남은 건 전문가 인터뷰. 여기저기 수소문해 이른바 '모기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학위를 받은지 얼마 안 됐는지, 생각보다 젊은 분이었다. 갑자기 폭증한 이유를 물었고 이 분은 '아마도 올해 이런이런 이유 때문에 늘어난 게 아닌가 한다'고 차분히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다음. 계신 곳으로 찾아갈테니 지금 말해주신 내용 정도로 인터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고, 돌아온 그분의 짧지만 단호한 대답을 듣는 순간 '이거 간단치 않겠다'고 직감했다.

"인터뷰는 어렵습니다."
-"왜요? 어디 가시나요?"
"그런 건 아니구요. 이건 집모기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저는 산모기 전문가입니다."
-".....네??"
"집모기와 산모기는 분야가 다르거든요."
-"(집모기나 산모기나 다 모기지...파리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방금 해주셨던 일반적인 이야기 정도만 해주시면 되는데요.."
"안 됩니다. 제가 산모기 연구하는 건 이쪽 분야에서 다 알기 때문에 제가 TV에 나가 집모기 얘기를 하면 저도 곤란해지고 웃음거리가 됩니다."
-"(빡빡하네..) 네, 그런데 오늘 휴일이라 저도 급해서 그래요..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집모기는 OOO박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연락처 알려드릴게요."
-"아, 그분 안 그래도 전화드렸는데 지금 받지 않으세요."
"네, 외국에 학회 가셨을 겁니다."
-"(어쩌라고..) 네, 그니까 박사님이 좀 해주시지요"
"아무래도 그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주 적절친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적절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어려우신가요?"
"네."

대화는 이렇게 끝났고, 나는 끝내 젊은 학자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내 사정이 급했던 그 순간엔 별스럽게 유난도 떤다고 뭐라 했었는데, 세월 지나 돌이켜보니 학자가 그 정도 엄격함과 자존심은 있어야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급할 때 인터뷰를 잘 해주는 전문가들을 기자들이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건 필요하고, 또 좋은 일이기도 하다. 다만 정도가 지나쳐 뭘 물어봐도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이야기 하는 일부 전문가들(역시 업계 은어로 '자판기')은 어느 순간 '피해야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오늘도 각종 프로그램에 의사와 변호사가 넘쳐난다. 의사가 남녀 관계에 전문가인양 조언을 하고 변호사가 다이어트 이야기에 숟가락을 얹는다. 그분들의 전문성보다는 '직함'에 기대기 때문이다.

'기자의 전문성'이란 말이 참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각 분야의 전문가를 잘 파악해 이런 이슈는 누구에게, 이런 문제는 누구에게 묻고 취재해야 적확하고 정확한지 그 네트워크를 늘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게 기자 전문성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려면 각 분야의 전문가가 다양하게 늘어나는 게 우선이고.

지난날 그 박사님은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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