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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닢channip Jul 20. 2021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

1000 년 전의 일본

내 남동생 노부노리가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울 때면 난 항상 옆에서 듣고 있었지. 그런데 나는 노부노리가 이해하고 외우기 어려운 문구들을 해독하는 데 몹시 능숙해졌어. 뛰어난 학자였던 아버지는 항상 "안타깝다, 이 애가 남자가 아닌 것은 정말 운이 나쁜 일이야!" 하며 아쉬워하셨지.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에 관심이 생긴 것은 위 구절 때문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얼마나 공부를 잘했으면 스스로 이런 말을 하며, 그 동생은 종종 비교를 당하는 것이 한국으로 치자면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일본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잠깐 설명하자면, '무라사키 시키부'는 가명으로 그녀의 작중 인물에서 따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궁중 기록으로 보았을 때 후지와라노 카오리코(藤原 香子)로 추측되고 있다. 대표작으로 <겐지모노가타리>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소설 중 하나를 저술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 천년 간 최고의 일본 문인 중 2위(1위는 나쓰메 소세끼)로 선정되었다. 대략 1000년 경 헤이안 시기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일본 엘리트 층에서 인기를 끈 이후에 황실 커뮤니티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본인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글로 남기는 까닭은 작가의 서술 방식이 굉장히 선명하게 그려지고 여성들 사이의 평가와 정치관계가 흥미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세히 읽은 것은 아니고 배경 또한 잘 습득하지 못하여 이 글 하나에 인상 깊은 부분만 뽑아보았다. 


51 <일본서기> 박사, <백씨문집> 진강

 이 부분은 맨 처음 인용한 구절의 앞 뒤를 더 가져와 보았다.

… 주상 전하께서 <겐지 이야기> 낭독을 듣고 계시다가, “이것을 쓴 사람은 그 어려운 <일본기>를 읽은 것 같구먼. 역사에 대한 학식이 느껴지니 말일세”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이 여방은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그 사람 어마어마하게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옵니다”라고 당상관들에게 얘기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게다가 저한테 “일본기댁”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고 하니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습니다. 

 <겐지모노가타리>의 저술로 황실에 인기를 얻게 되자, 무라사키 본인이 박식함을 과시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인물을 비판하고자 이야기를 꺼낸다.


… 식부승인 남동생이 어렸을 때 한문책을 읽고 있다가 막히면, 옆에서 듣고 있던 저는 신기하게도 그 부분이 다 생각나서 대답했는데, 학문을 중시하시던 아버지께서 그것을 보시고, “네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정말 안타깝구나”라고 한탄하신 일은 있으셨습니다.


 이 부분은 처음의 인용한 부분과 같다. 그리고 다음의 마지막 부분이 가장 압권이다.


하지만 남들이 “남자인 경우라도 공부 좀 했다고 떠벌이는 사람은 크게 출세 못하지”라고 말하는 걸 듣고 저는 더더군다나 한일자도 못 쓰는 듯이 지냈습니다… 그 여방이 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중궁님께서 제게 한시문을 배우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 입 가벼운 여방 귀에 안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만일 알게 되면 더 심한 험담을 여기저기에 하고 다닐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세상 사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렵고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무라사키는 스스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아도 지식에 능통하고, 한시를 가르칠 정도로 훌륭한 소질을 갖고 있음을 본인이 알고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소문을 내는 인물은 그러한 사리분별을 배우지 못하고 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평가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세상 사는 것이 어렵다는 마지막 말로써 본인의 처지를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표현하는 방식이 마치 현대인이 적어놓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50 저마다 다른 여방들의 심성


여자란 모름지기 남 보기에 흉하지 않게 온화한 마음을 갖고 차분하게 행동해야 품위도 생기게 되고 흥취도 알게 되는 법이지요. 교태가 심하고 지조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래 타고난 성품이 솔직하고 순수하다면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미움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에 신경을 써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거슬리는 일이 자꾸 생기기 마련입니다. …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상대방에게 안 지려고 심한 말을 퍼부으며 험악하게 노려보는 사람과 애써 감정을 누르며 온화한 표정으로 참고 있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무라사키의 일기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글들이 많다. 노골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면서 누구는 어떤 점이 매우 불편하고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등의 직접적인 표현을 하고 소위 남을 '정치'한다는 면이 엿보일 때도 있다. 위의 글은 직접적인 인물을 언급하지 않지만, 꼭 누군가를 은근히 비판하는 듯하여 재밌었다.
   

10 기도하는 사람들 - 9월 10일

아래 글들은 묘사의 방식이 매우 재밌어서 인용하였다. 관찰하는 입장에서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세세히 그려지고 있으며 모호한 구석 없이 쉽게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글을 훑으면서 읽었음에도 흡인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작가였다. 


… 지금 중궁님 처소 동쪽 방에는 주상 전하의 여방들이 대령해 있고 서쪽 방에서는 수도승들이 대령해 모노노케를 옮겨 붙게 한 사람을 하나씩 불러 큰 소리로 염불을 외며 퇴치하고 있다. 남쪽 방에는 고승들이 겹겹이 둘러않아 마치 부동명왕을 살아오시게라도 하려는 듯 쉬지 않고 염불을 올려서 목이 다 쉬었는데, 그 쉰 목소리가 오히려 부처님의 존엄함을 더 느끼게 했다. 북쪽 장지문과 중궁님 칭상 사이 얼마 안 되는 공간에 40 명도 더 되는 사람이 빼곡하게 앉아 중궁님 순산을 기원하다 보니, 모두들 꼼짝달싹 못하고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가에서 막 도착한 여방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며 엉킨 치맛자락과 소맷자락을 잡아 빼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궁님 용태가 걱정스러워 소리를 죽여 가며 우는 고참 여방도 있었다.


15 첫 목욕 의식 - 같은 날 밤


.. 황자님은 대감님께서 안고 오셨는데, 고쇼쇼 여방과 미야노 내시가 각각 신검과 호랑이 두상을 들고 그보다 앞섰다. 내시의 당의는 솔방울 문양이 그려진 것이었고,  치마는 바다 그림 위에 주변 경치를 수놓은 것이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이 치마 허릿단으로, 얇은 천에 당초 문양을 수놓아 매우 화려했다… 대감님의 두 도련님과 겐노 소장께서 쌀을 뿌리시는데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소리가 크게 나게 뿌리셨다. 마침 호신법 때문에 대령해 있던 조도사 스님은, 쌀을 피하려고 얼른 부채를 펴서 머리 위에 썼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젊은 여방들은 웃음을 못 참고 내내 키득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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