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녀와 에스파, 그리고 앞으로의 k-pop
세계관의 등장은 케이팝 장르에서 전환적 포인트였다. 음을 중심으로 이미지가 보조적 역할을 하고 가사의 역할은 탈구된 기존의 케이팝에서, 가사 텍스트가 노래를 진행시킨다거나 이미지가 음악의 중심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달의 소녀 이전의 여러 그룹들이 세계관을 말하였지만 이는 멤버들의 캐릭터 구성에 불과하였고, 실질적으로 '세계'를 구현하여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준 그룹은 이달의 소녀가 시초였다.
이달의 소녀가 <Butterfly> 이후 발표한 곡은 <So What>인데, 이때부터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 이유는 총괄 디렉터가 교체되고, SM 이수만 대표가 프로듀싱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세계관은 너무나 먼 미래로 가버리게 된다. 세계관이 창조해낸 이미지는 다시 SM 엔터테인먼트가 잘하는 '캐릭터성'과 '영상 미학'으로 회귀하였고, 이달의 소녀의 세계관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달의 소녀 멤버들은 각각 개성 있는 모습으로 멋진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 뮤직비디오나 티저에서 그룹의 정체성이나 그들만의 서사가 명확히 보이지도 않는다.
두 곡 사이에는 생략된 상황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나비처럼 달을 향해 날아가려는 소녀들을 보다가, '달의 운명(달의 앞면만 보이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고, 너 자신을 태워라'라고 말한다. 뜨거운 열정으로 도전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는 행위라고 하지만, 그것이 음악과 시각의 유기적 연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태양 가까이 다가가다가 회귀해서 달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데, 곧바로 달의 뒷면을 지적한다. 달을 향하는 것이 '목표', 혹은 '자기애'와 같을 때, 달의 뒷면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내면적이고 잠재적인 부분일 것이다. 달의 뒷면을 보라는 말은 슬로건으로 남을 뿐이며, 기존의 뮤직비디오에서의 음악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가사, 이미지가 달의 뒷면을 성찰하는 행위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가사와 이미지는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불똥이 지구로 떨어지는 상황이란, 날아오르자마자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격이다.
따라서 이달의 소녀가 'So What'부터 보여준 모습은 단순히 음악적 대중성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라도, 세계관의 복구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수만 프로듀서는 두 곡만 만들어주고 다시 SM엔터테인먼트에 돌아가서 그다음 해에 새롭게 데뷔한 그룹이 메타버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에스파'이니, 이달의 소녀는 그야말로 '빼앗긴 세계관'만 남아 이제는 더 이상 힘을 못쓰게 되었다. 슬프게도 현재 이달의 소녀의 프로듀싱은 영상 미학도 희미해지고 각각 멤버들의 캐릭터 성만 남아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므로, 그리고 기존의 가지고 있던 화제성도 시간이 지나 떨어져 나갔기에 정체성을 재구축하기에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그들이 세계관 속에서 향하던 달에는 도착을 했고, 그 이후의 모습을 구상하지도 않은 듯 보인다. 나는 그럼에도 이달의 소녀 세계관은 디렉터가 바뀌던 그 변곡점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차근차근 메워 나간다면 세계관 자체를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관이 음악 속으로, 이미지 속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이 음악적 성취만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케이팝 산업이 크고 작은 소속사 할 것 없이 온갖 요소들을 섞어서 작업을 내놓고 있으며, 뮤직비디오에서 굵직한 성과를 내고 있는 회사들도 대형 소속사가 많기는 하다. 그럼에도 대형 소속사의 아이돌은 실력이야 어쨌든 처음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중소 기획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가 좋아야 하는 것은 케이팝이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기에 너무나 당연하고, 문제는 어떻게 보여주어야 중소 기획사라도 주목을 받을지 깊이 고민한 결과 중 하나가 세계관의 구체화였다.
세계관이란 실상 중소 소속사의 살아남기 위해 발전한 장치이지만, 이제는 대형 기획사들이 앞다투어 필요도 없는 세계관을 사용한다. 그들에게 세계관이란 부수적으로 음악적 효과를 돋보이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대형 소속사는 모든 화제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따라서 음악적 성취 이상으로 돋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평가받는다. BTS의 소속사 하이브는 소설과 만화 매체 등으로 서사를 확장하려고 하지만 이는 음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업 영역의 확장이다. 앞서 예를 든 대표적인 세계관 가수 에스파도 '블랙맘바', '광야' 등의 세계관 단어가 케이팝 매니아 사이에서 통용되지만, 그들은 세계관이 없었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에스파를 띄운 것은 'Next Level'의 '냅다 디귿 춤', 노래 커버 영상 등 음악과 퍼포먼스라는 기존 케이팝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케이팝은 '세계관의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본다. 매너리즘이란 나쁜 뜻이 아니라 세계관이 음악에 미치는 영향이 인물 중심으로 반복될 것이며, 세계관을 통한 복합매체로서의 케이팝은 이달의 소녀가 보여준 것 이상으로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에스파가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감히 예측한다. 에스파에게 세계관이라는 것이란 음악적으로도, 대중의 영역에서도 그리 중요치 않은 요소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에스파란 그룹의 중요성은 블랙맘바 같은 마블(Marvel) 스타일의 빌런들이 등장하려는 세계관 내러티브보다, 현재 진행형인 SM 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들을 엮는 케이팝 역사적 세계관이 더욱 기대되는 부분이다. 최근 S.E.S의 곡을 리메이크한 <Dreams come true>는 에스파가 반짝하고 등장한 그룹이 아니라 20여 년의 SM 음악사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SM의 메타버스 세계관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고 에스파를 통해 케이팝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은 그들의 아티스트들을 기다리게 하는 요소이다. 반면 아직까지 그들이 보여준 세계관 이미지는 흥미롭지만 재미있지 않다. 아이(ae)라고 불리는 아바타를 만들었지만 그 속의 내러티브는 상업영화보다 참신하지 못하다. 아바타나 메타버스 공간이 그들의 정체성이 되었기에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음악성과 그들의 역사적 위치에 비견했을 때 굉장히 미미한 부분이다. 이는 여타 세계관 아이돌들도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특별한 세계관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지점에서 에스파는 세계관 그룹의 전성기와 세계관의 종언을 이룩할 것이라고 본다.
중소 소속사들의 여타 세계관 기반 아이돌, 특히 대중성을 요하는 여성 그룹의 경우 팬덤의 강력한 힘이 있지 않다면 세계관을 채택하는 장점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달의 소녀가 기획부터 세계관의 참신함과 세련됨을 거의 완성된 형태로 'Butterfly'까지 일관되게 표현해왔지만, 이달의 소녀 소속사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의 재정 불능인 현 상황을 반추해볼 때 중소회사가 팬들의 입질을 기다려줄 시간이 있을 지도 의문이다. 세계관은 구축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며, 지금 상황에서 중소 기획사의 성공은 세계관보다 음악성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나의 생각은 지금 중소 기획사부터 대형 기획사까지 세계관을 테마로 하는 아이돌들은 많지만, 그들이 성공하더라도 세계관은 주요 요인이 아닐 것이다. 어떤 멤버의 상징색이나 상징 동물이 무엇인지, 일반 대중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계관이 아이돌 인물 캐릭터를 설정하고 일관적으로 음악과 어울리도록 할 경우, 기존의 케이팝 시각 문화가 그랬듯이 인물의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는 형식으로 흥행을 이끌 수는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세계관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기보다 과거 성공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형식일 때 가장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계관의 확장이란 무의미한 일이었는가? 세계관이 캐릭터와 서사 구조를 넘어서 그것이 작사에 영향을 주고, 곡의 분위기를 부여하고, 이를 따라서 시각적 장치를 고안하도록 확장해온 방식으로 발전했고 시각 문화사-미술사의 영역에 충분히 진입하였다는 설명은 미래에 적용되지 않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적어도 미래의 케이팝과 시각 미디어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한 세계관이 넓혀놓은 시각의 기능은 음악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양하게 작동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 적합한 질문은 '앞으로의 음악은 시각적 효과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케이팝에서 시각적 효과가 더 정교한 형태로 음악과 상관관계를 맺으며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음악이 좋은가'이다. 케이팝은 음악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감각의 마비를 유도하는 장치로 뮤직비디오를 사용하면서 아이돌에 집중하거나 미학적인 추구를 하였다. 이때 세계관은 케이팝 음악에서 다소 비어있는 가사가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잘 파고들었다. 세계관 자체가 진부해지고 사라지는 추세로 변한다면, 케이팝 산업은 다시 미학적인 형태를 추구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다른 무언가가 추가되어 세계관이 채워주던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능에 상상을 덧붙여 보자면 에스파가 새롭게 시도하는 메타버스의 시각화가 미래지향적 케이팝에 가장 가깝게 보인다. 그 세계가 현실이 될 때, 즉 청각과 시각 이상으로 후각, 촉각, 미각 등이 음악을 꾸밀 수 있게 된다면, 음악에서 시각의 역할은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할 것이다. 실은 이러한 점에서 다른 아이돌보다 에스파의 확장 가능성을 훨씬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세계관은 케이팝 산업 속에서 점차적으로 개입하여 이달의 소녀에 이르러 완전한 형태를 이루었다. 음악이 시청각을 통한 미학성을 극대화하여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 이상으로, 이달의 소녀의 음악은 세계관을 창조하고 우리의 일상까지 그것을 확대하고자 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대중적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하였을 지라도, 이달의 소녀 세계관은 음악과 뮤직비디오의 연결지점을 명료히 확보하였고 음악 이상의 영역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아가고자 함을 뚜렷이 드러내 주었다. 이달의 소녀는 그렇기에 케이팝 시각 미술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앞서 쓴 세계관의 확장 글을 통해서 그들이 다른 그룹들이 확보하지 못한 세계관의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산업 생태계의 변화에 세계관이 음악에 미칠 영향은 미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케이팝의 영역은 세계관의 확장이 보여준 가능성은 어떤 형태로든 반복되면서 새로운 시도 속에 계속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