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 Mar 14. 2020

just stand

푸른 잎이 막 돋아 나기 시작하는 싱그러운 나무들 사이에
한 나무만 홀로 마른 생선가시 같이 앙상하고 뾰족하게 서  있었다.
그 나무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까치였다.
까치는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자기 뱃속에 동그란 생명을 위해서 그 나무에 둥지를 만들 참인가 보다.
그러면 저 보잘것없어 보이던 앙상한 나무가 까치들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가 될 것이 아닌가.
풍성한 초록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으스대는 소리를 낼지라도 저 앙상한 나무는 단단히 둥지를 받쳐주고 어미 까치와 새끼들을 따뜻하게 지켜줄 것이다.

그 광경이 훤히 보이는 창가를 등지고 앉은 남자는 긴 테이블에 앉아 낮게 중얼거리고 있다.
자신의 귀에만 들릴만큼의 말을 읊조리며 시끄러운 배경들을 등지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낱말들이 자기가 읊조리는 말들과 섞여 들려올 때가 잠깐씩 있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자신이 아는 사람의 뒷모습을 뒤쫓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자기가 읊조리는 말들의 뒤꽁무니를 쫓을 수 있는 듯하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들은 그 말들을 외우기 위해서였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는 대사를 외우고 있는 중이다.
그는 무명의 배우다.
아니 그는 이름이 버젓이 있다.
세워서 빛내라는 멋진 뜻을 새긴 부모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름이.

하지만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무명배우라고 한다.

아무튼 그는 중얼거리고 있다.
이 남자가 대사를 외울 수 있기 위해 조용해주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이 시끌벅적한 곳에서.

남자는 자기의 생각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소화하기 위해 같은말을 수십번 곱씹는다.
입술과 혀로 글자들을 굴린다.

한 줄 한 줄의 대사들을 툭 치면 드르륵 나올 때까지 달달달 외워버린 후에

이제 이 말들이 ‘내 말’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다시 곱씹는다.

다시 곱씹으며 그는 생각한다 ‘ 왜 이렇게 말했을까 ’
이게 내 말이 될 수 있을지 의심되기도 한다.

활자를 줄줄 외우던 그는 딱딱한 활자 속에 숨어있던 마음을 발견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한 말이 아닌데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되어버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된 대사들은 곧 그의 생각을 차지하게 된다.
그의 생각이 된 대사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사는 그의 마음에 스며들며 그가 내뱉는 호흡에 실린다.
이젠 말을 하지 않아도 말들이 그의 눈에서 출렁거리는 걸 볼 수 있다.
말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우수수 쏟아져 버린다.

그렇게 말을 하는 남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겠다.

뒤이어  그가 참 멋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은 활자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삶을 품고 있던 거였다.
그의 눈에는 말의 자국들이 꾹꾹 눌러 박혀있었다.

그의 꿈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여러 번 있고
골똘히 멈춰있어야 할 때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듯 하지만
그는 분명 이 시끄럽고 쓸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들을 따듯하게 품어내고 머지않아 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같이 그가 언제나 서 있을 수 있기를, 빛 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도 그의 부모님처럼, 다른 이를 품어주고 세워주며 삶의 연장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난 그 사람의 앙상하지만 단단한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