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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초 Jul 07. 2023

한 걸음, 한 걸음

호주 간호, 그 길을 가보시겠어요..?

호주에서 일을 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에서 살고싶어졌다. 또 코로나가 터졌던 때라, 오랫동안 일 할 수 있는 직업을 찾는데에 혈안이 되어있던 참이었다. 그런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공부와 직업은 간호였다. 나는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리워드를 많이 받고 기쁨을 누리는 편이기에 어떠한 거부감도 없었다. 호주로 가서 간호 공부를 마치고 간호사가 되어야겠단 생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길로 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었다.

내가 호주에 오기까지의 길을 짧게나마 설명해보겠다.


<1. 부모님 설득하기>

21살 씩이나 먹은 자식이었지만 부모님에게는 늘 물가에 내다놓은 어린아이였을 뿐일테니, 부모님께 내가 갈 길을 설명하고 혹여나 그 길에 문제가 생겨 사면초가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법도 설명드렸다. 내가 갈 길은 호주에서 간호를 공부하는 것이었으며 졸업 후 비자를 받고 일하다가 영주권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이 플랜의 맹점은, 이민법과 비자가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맹점으로 인해 플랜에 차질이 생겨서 영주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내가 생각한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하는 수 없다. 내 나라로 돌아와서 간호사를 하거나 영어권의 다른 나라로 다시금 모험을 떠나면 된다. 그래서 내가 다닐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인정이 되는지도 확인을 했었더랬다. 

부모님과 언니, 형부를 앉혀놓고 ppt로 설명하고 질의 응답을 받았다. 언니와 형부, 부모님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엄마 아빠의 한숨을 피하진 못했다. 한숨쯤은 가뿐히 이겨낼 수 있었고, 나는 그 한숨을 기쁨으로 돌이켜드릴 자신이 있었다. 


<2. 유학원과 컨택하기 & 학교 정하기>

나와 호주학교를 이어줄 에이전시를 찾아야했다. 유학은 큰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믿을만 해야했고 정보가 풍부하고 깨끗해야만 했다. 어렵지 않게 한 곳을 찾았다. 나는 대학교로 편입하는 길을 물었다. 그러나 이게 왠 걸, 내가 간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역을 공부했고 많은 학기를 수료하지 않았기에 크레딧 즉, 편입시에 필요한 요건이 충분하지 않다라는 청천벽력의 코멘트가 돌아올 뿐이었다. 그게 아니고 대학으로 바로 들어가려면 파운데이션 이라는 코스를 신청해야했다. 그러나 파운데이션은 학교 정규 코스가 아니고 엑스트라와 같은 개념이라서 대학교 3년의 수료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즉, 돈만 거의 더블로 더 들어가는 경우라는 뜻이었다. 젠장, 가뜩이나 돈이 많이 드는데,,,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에이전시는 나에게 TAFE라는 직업전문 퍼블릭 스쿨을 추천해줬다. 왜냐고? 

첫째, 고등학교 졸업장과 일정 수준의 영어점수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음. 

둘째, 일반 유니(대학)보다는 학비가 훨씬 저렴함. 

셋째, 일년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수료기간. 

넷째, 졸업 후에 EN(enrolled nurse)으로 근무 가능. EN은 RN(registered nurse = 우리가 생각하는 병원의 일반적인 간호사)과 하는 업무가 많이 겹치는 간호사로서 간호조무사인 AIN의 윗 등급의 간호사이다. 

다섯째, 졸업 후에 유니로 편입하여 공부 가능. (그래서 3년이 아닌 2년만 공부하면 졸업가능) 

이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였다. 더욱이 그곳에서 한 학기만 공부하면 AIN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겨서 배운 것을 이용하여 일 할 수 있어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가지 단점, 워크비자는 2년 이상을 공부해야만 나오기 때문에 TAFE를 졸업한다고해서 워크비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멜번 쪽에는 2년 과정의 TAFE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제가 가려던 곳은 브리즈번이었기에ㅎ..ㅠ) 그래서 꼭 워크비자를 받고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려면 졸업 후 유니로 가야한다. 아니면 운 좋게 EN이나 AIN으로 병원으로부터 스폰을 받아야 하는데,,, 인생이 뭐든 맘 먹은대로만 되지는 않으니,,, 나는 최악을 예상하며 계획해야만 했다. 


<3. 영어 점수 맞추기 & 나름대로 큰 돈 벌어보기>

학교를 들어가려면 IELTS each band 7.0 이상 이라는 점수가 필요했다. 혹은 PTE라는 또다른 영어 시험의 점수 each band 65점 이상이 필요했다. 시험 한 번을 보더라도 25만원 이상이 들어가는 시험들 이기에 나로서는 시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더랬다. 그래서, 더이상 편의점 알바가 아닌 더 큰 돈을 만들 수 있는 알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키즈카페, 근데 그곳에서 영어선생님을 구하던 것이였다. 월급도 나쁘지 않았다. 이전의 시급 알바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나는 당시에 opic이라는 영어 말하기 시험에서 IH등급과 토익 910점을 받을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고 있었다. 나도 안다,,, 이것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미취학 아동들의 파닉스 정도는, 영어로 놀이를 함께할 수준 정도는 된 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원을 했고, 면접을 본 후 일을 하게 되었다...(이 학원에 대해 할 말은 무지하게 많지만 나중에 풀도록 하겠다...) 어쨌든 시험을 맘 놓고 볼 수 있는 정도의 돈은 수월하게 모을 수 있었다. 좋은 경험이었고 아이들과의 행복했던 추억은 덤이였다:) 그러나, 그 일에 너무나 빨리,, 너무나도 잘,, 적응을 했던 것일까?? 호주로 가기 위한 영어 공부를 할 체력이 없어졌고 시간이 없어졌고 무엇보다 가고싶은 갈증이 없어졌다. 그렇게 한 10개월 정도를 일 하다가 등대를 잃고 떠도는 배가 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최종 목표는 여기가 아닌데...'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한 두달 PTE 공부를 빡세게 했다. 첫 시도는 64점이 한 과목 있어서 말그대로 과락을 했고, 두번째 시도에서는 필요 점수인 65점을 훨씬 웃도는 85점을 맞았다. 밖에서 점수를 확인했는데 너무 행복해서 거리를 방방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리도 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더랬다 ㅎㅎ.

(PTE시험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다... 나중에 썰을 풀도록 하겠다..) 

암튼 이제 드디어, 꿈을 꾼지 어언 일년만에 첫번째 스텝을 지나갈 수 있었다.


<4. 서류 과정>

학교에 나의 신변과 영어 점수, 가족 관계와 학교 생활, 나의 통장 잔고까지도...! 보여줘야만 했다. 그 외에도 더 많지만 너무 자세히 들어가다가는 그 얘기만하다가 끝날게 뻔하다... 

사실 이 과정이 제일 복잡하고 귀찮았다 나에겐,,,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 뜯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ㅎㅎ... 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에이전시에게 서류들을 전달 후 나는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학생비자를 받아낼 수 있었다.


<5. 출국 그리고 방 구하기>

비행기 표를 끊고, 브리즈번으로 날아왔다. 싱가폴 창이 공항을 경유했는데 2시간 정도라 괜찮았다. 비행기 삯은 안 괜찮았다... 각설하고! 7월 비오던 첫날의 브리즈번을 아직도 기억한다. 시끄럽지 않은 국제 공항과 낯설은 언어(십몇년을 공부한 영어지만 한글에 비하면 낯선 것이 당연하다..!)까지 그리고 7월의 서늘한 공기까지 생생하다. 도착하자마자, Optus에 들려서 유심칩을 샀고, Go card라는 브리즈번 교통카드를 샀다. Go card로는 열차, 버스, 페리등의 대중교통을 사용할 수 있다. (학생이면 거의 50% 수준의 할인이 가능하다! 오예오예) 그리고 도착한 바로 다음날 Flat mate 앱으로 찾은 집에 inspection을 갔다.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했던 주세에 집주인도 아주 친절했다. 그러나 내가 학기를 시작한 후에야 집에 들어올 수 있다기에,,, 실망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이러이러한 상황이라 그날 전에는 방을 찾아야 하는데 갈 곳이 없어,,, 너희 집이 마음에 드는데ㅜ 라고 보냈더니 자신의 집에 spare room이 있으니 그 때까지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집주인 부부는 어린 나를 부모 처럼 돌봐주었고 가끔 저녁도 챙겨주고 주말엔 같이 브리즈번을 투어했다. 두 부부에게 참 감사했고, 하나님께 더없이 감사했다. 홀홀단신인 이 곳 브리즈번의 첫인상은 이런 사연들 덕분에 아름답게 물들었다.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난 아직 이곳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죽지만 말자. 어떤 일이 생겨도 좋으니, 앨리스야 죽지만 않으면 돼' 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죽지 않았으니 오늘도 잘 살았어'라는 말로 하루를 끝내고 잠들었을꼬. 그 시기에 적었던 일기에 "죽음을 두손에 쥐고 매일을 앞으로만 걸으리"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이런 마음이었다. '나는 오늘 죽지 않았으니,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으니 잘 산 것이다. 그러니 더욱 더 용기를 갖고 내일을 꿈꾸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내 삶이 안정 궤도에 들어갈 때까지, 후회 하지 말고 내일을 바라보자.'


지금은 차근차근 달음박질 후에 안정궤도에 들어왔고, 가끔은 뒤도 돌아보며 지난 날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지나온 1년의 내용은 나중에 천천히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우선 앞으로는 요즘의 일상과 경험을 나누기로 ㅎㅎ.


그럼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를,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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