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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Dec 18. 2023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다 보니 최고가 되었다

성공한 청개구리, 프롬 소프트웨어와 라리안 스튜디오

어릴 적 어른들은 게임은 어린애들이 한 때나 하는 시간낭비라고 많이들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게임도 어엿한 종합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시대가 왔고, 어릴 적에 어른들의 따가운 눈총을 참으며 게임을 하던 친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서도 게임을 한다. 한 해 최고의 게임을 선정하는 TGA(The Game Awards)에는 이제 티모시 샬라메, 매튜 맥커너히를 비롯한 헐리웃 톱스타들이 무대에 오르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화감독이나 타 예술 분야의 인재들이 게임 업계에도 눈독을 들이는 등, 게임은 이제 문학, 음악이나 애니메이션, 영화와 거의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수익성이 있는 어엿한 문화 산업으로 발돋움했다고 생각한다. 한 분야가 메인스트림에 오른다는 것에는 자본의 증가에 따른 퀄리티 향상을 비롯한 수많은 장점들이 따라오지만, 의외로 단점이나 부작용도 동반된다. 큰돈이 움직이는 예술 분야에는 창작자의 자유가 점차 제한된다는 한계점이 있는데, 근래 동향을 보면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너무 어려우면 초짜 게이머들이 유입되지 않으니 난이도를 적당히 쉽게 해야 하고, 중간에 지갑도 열게 만들어야 하니 결제하면 승률을 높이거나 캐릭터의 모습을 더 예쁘게 꾸며주는 과금 요소도 집어넣고, 일단 완성도를 떠나서 빨리 돈 벌어야 하니 미완성이어도 적당히 되는대로 시장에 내놓고 오류나 버그는 추후에 잡아도 된다는 등 게임을 만든 창작자보다는 투자자들의 의도에 따라 업계가 움직이기 마련이고, 이 와중에 유저들의 피로도와 짜증, 모든 게임이 껍질만 다르고 열어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식상함 등을 유발하게 된다.

아카데미 아니고 게임 시상식 맞아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게임을 잘하지 못한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순간은 비단 구기종목이나 운동을 할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게임 컨트롤에도 매번 찾아온다. 길 찾기도 젬병이고, 그러면서 또 성질은 급하기 때문에 되는대로 달려가다가 적에게 맞거나 죽기 십상이다. 게임을 오래 쉬었다가 다시 시작했을 무렵 의외로 예전에 비해 진행이 쉬워진 탓에 '어? 내가 어렸을 때에 비해 실력이 늘었나?' 생각했으나 업계의 동향에 따라 게임들의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쉬워진 것뿐이었고, 어릴 때 하던 고전 게임을 다시 시도하면 그 시절의 악몽은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똥손'인 나에게 게임의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쉬워지는 트렌드는 그렇게까지 달갑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소위 말하는 프롬 소프트웨어에서 발매해 온 '소울류'의 게임에는 한동안은 전혀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크 소울' 시리즈와 '블러드본', '세키로', '엘든 링' 등 어렵기로 악명 높은 게임들, '모르면 죽어야지' '유다희(You Died) 양과의 끊임없는 데이트'라는 슬로건이 붙는 이 게임들은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영원히 이런 류의 게임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 같았으나, 플레이스테이션5를 구매하면서 슬슬 마리오나 포켓몬과는 거리가 있는 어두운 세계관과 비주얼을 가진 게임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기심이 발동했던 나는 결국 할인 이벤트에 이기지 못하고 '엘든 링'을 뒤늦게 구매했고, 걱정했던 바와 다르지 않게 '소울류 뉴비'였던 나는 시작부터 헤매다가 무한한 죽음을 맛보았다. 밀려오는 잡졸들에게도 고전하며 전혀 진행을 하지 못하던 차에 "아, 게임 잘못 샀네."라고 후회가 밀려왔으나, 어느새 같은 구간을 악으로 깡으로 두 시간 정도 반복하다가 보니 해당 구간에서 결국 살아남은 나 자신을 발견했고,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수 차례 죽음을 맞았으나, 2보 전진과 1보 후퇴를 반복하는 기분으로 하다 보니 점차 죽음의 공포보다는 그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즐거움이 느껴졌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적들에게도 위협감이 들기보다는 "아, 나와 놀아주기 위해 존재하는 친구들이구나."라는 친근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이후에 나는 '블러드본'과 '다크 소울 3'도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잘 못하지만 '뭐 그러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즐기게 되었다.

이게 다~널 위해서...형이...응...?

만약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이 단순히 어렵기만 하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전혀 매력을 못 느끼고 지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분명히 난이도가 꽤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엘든 링'이나 '블러드본' 같은 게임을 하다 보면 드는 생각은 '아, 조금만 더 하면 깰 수 있겠는데?'라는 '어렵지만 할 만하다'는 확신이다. 분명 타 게임에 비해 적은 강하고 나는 약한 것이 맞지만 아무리 죽어도 '게임 오버'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고, 적들은 늘 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패턴의 공격을 한다. 반복적인 플레이는 나 같이 '컨트롤이 후진' 플레이어에게도 숙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집중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10전 9패이긴 하지만 해당 구역의 보스를 깨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성장감과 성취감을 제공한다. 게다가 비주얼과 세계관, 분위기 자체가 매력이 있고 다소 난해한 전개의 스토리도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미묘한 중독성으로 빠져들게끔 한다. 이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현 사장인 미야자키 히데타카가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판타지 계열 이야기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던 경험을 토대로 생긴 개성적인 스토리텔링 방식 때문이다. 그는 해외 원서 중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 도서관에서 대여 가능했던 부분만을 읽고 나머지는 상상력으로 내용을 만들어내어 갖다 붙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비슷한 형태로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 프롬 게임들의 또 다른 개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게임 업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회사가 프롬 소프트웨어라면, 서양에는 이에 견줄 만한 곳이 라리안 스튜디오이다. 라리안은 벨기에의 게임 회사인데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게임은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시리즈와 올해의 화제작인 '발더스 게이트 3'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상당수의 회사들이 미완성의 형태로 기한에만 맞춰 충분히 테스트해보지도 않은 듯한 게임을 발매하는 경향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와는 반대로 '발더스 게이트 3'는 팬들의 원성을 들을 정도로 오랜 기간의 베타 테스트 및 얼리 액세스 기간을 거쳐 수 차례의 검수와 수정 후에 발매되었다. 아쉽게도 기나긴 사전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발매 시점을 기준으로 버그나 오류가 없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게임이 칭찬을 받고도 남을 만한 이유는 오랫동안 고전 RPG 장르의 매니아들이 꿈으로만 꾸던 것을 게임세계에 정말로 충실히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모여서 하는 명절놀이...가 아니라 원조 RPG

사람들이 모여 진행자의 주도 하에 주사위로 플레이하는 서양식 던전 앤 드래곤류의 게임이나 국내에서도 한 때 유행했던 MUD와 같은 텍스트형 RPG는 그 세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시되지는 않으며 플레이어의 상상력에 의존해야 했지만, 참여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높은 자유도와 경계가 없거나 희미한 드넓은 세계관이라는 장점이 있기에 비디오 게임의 공세에도 밀리지 않고 오랫동안 매니아들 사이에서 나름의 자리를 지켜왔다. '발더스 게이트 3'는 이러한 자유도를 비디오 게임이라는 형식에 가장 충실하게 구현해 낸 작품이다. 당연히 세계관이나 룰은 일정 틀 안에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플레이어는 다른 그 어떤 게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선한 영웅이 될 수도,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악인이 될 수도 있으며, 스토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도 여느 엑스트라와 다름없이 만나자마자 기절시키거나 죽여버릴 수도 있다. 분쟁의 상황에 마주했을 때는 일반적인 방식의 전투를 진행할 수도 있지만, 적을 설득하거나 협박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진행할 수도 있고, 성인용 등급의 게임답게 폭력이나 성적인 표현의 수위도 매우 높다. 게임 속 동료 캐릭터들과의 여정을 진행하다 보면, 마치 어렸을 때 보던 유치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모험 만화가 성인용 등급으로 돌아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듯한 느낌도 있으며, 스스로 하나의 소설을 자유롭게 써나가는 듯한 기분도 들게 된다. 게다가 이런 자유로운 모험의 모든 경우의 수에 맞추어 녹음된 방대한 양의 대사들과 그에 맞춰 만들어진 컷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노라면 이 게임에 들어간 성의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일종의 광기로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동료들과 함께 떠나는 신나는 모험!!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크리에이터들의 광기 혹은 CEO의 아집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이지만, 트렌드와 흐름에 뚝심 있게 역행한 덕분에 프롬 소프트웨어와 라리안 스튜디오의 게임은 나름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어렵고 복잡한 게임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유저들에게 어필하고 흥행할 수 있었다. 그 덕에 2022년에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엘든 링'이, 2023년에는 라리안 스튜디오의 '발더스 게이트 3'가 각각 그 해의 TGA의 가장 큰 상인 Game of the Year(올해의 게임상) 부문에서 수상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물론 트렌드를 따라가고 업계의 흐름에 편승한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고, 이 역시 칭찬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올해와 작년의 '최고의 게임'이 모두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해온' 청개구리 같은 회사들의 작품이라는 점은, 현재 게임 업계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의 분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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