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하고 장황하지만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
*해당 글에는 '로건'을 비롯한 '엑스맨' 프랜차이즈,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2' 및 이후 언급하게 될 다양한 작품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2020년에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2'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무렵, 분노를 쏟아내는 이들에게 크게 공감하면서도 나는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3자의 시선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만을 제공하는 영화라는 매체와 직접적인 체험에 가까운 게임이라는 매체의 차이가 ‘라스트 오브 어스‘의 팬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게임의 플레이방식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방법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더 큰 트라우마를 안겨준 너티독의 충격적인 행태는 여러 의미로 놀랍긴 했으나, 어릴 적에 그 어떤 게임보다도 영화를 좋아했던 나에게 앞으로 이야기할 속편들이 준 충격은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팬들에게 안겨준 상처만큼 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엑스맨 프랜차이즈에서 휴 잭맨이 연기했던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를 떠나보내기 위한 2017년작 '로건'에서는 그 의도에 걸맞게 해당 캐릭터가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주연 캐릭터의 사망이라는 점 외에도 이 영화가 엑스맨 프랜차이즈 전반에 걸쳐 스토리상으로 미치는 충격이 큰 이유는 작중에 대다수의 엑스맨 캐릭터들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연배우인 휴 잭맨을 비롯하여 제작진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영화가 기존 엑스맨 영화들과는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이야기라는 점을 개봉 이전부터 꽤나 강조하였다. 물론 감독인 제임스 맨골드가 이를 부정하면서 팬덤에서는 다소 혼란이 있기는 했으나, 현재는 다시 공식적으로 '로건'과 기존 엑스맨 프랜차이즈의 세계가 다름을 명확히 규정지음으로 인해, 울버린을 비롯한 대다수의 캐릭터들이 죽음을 맞이한 이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개로, 공식적인 세계관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좋아했던 캐릭터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했다. 굳이 이런 논쟁이 일어나고 크리에이터들이 이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규정짓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시리즈와 함께 했던 팬들이 느낄 허무감과 배신감에 대해 알고 있고, 이러한 팬심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건'이라는 작품이 아무리 잘 만든 명작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전 작품인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울버린을 비롯한 캐릭터들이 소위 말해 '개고생'을 겪으면서 겨우겨우 맞이했던 행복했던 결말을, 이 작품 하나로 허무하게 박살 내 버린다면 이에 대해 크게 반감을 갖고 상처받을 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2006년작인 영화 '엑스맨 3(최후의 전쟁)'는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액션이나 전개 자체는 전반적으로 재미있으나, 프로페서 엑스와 싸이클롭스를 비롯한 주요 인물의 상당수가 허무한 죽음을 맞거나 능력을 잃고 작품에서 퇴장하며, 이러한 과정이 비장하고 장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사 한 대 잘못 맞고 쓰러지거나 주변 인물들의 권유를 만류하고 떼를 쓰듯이 단독행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식이라 해당 캐릭터의 팬들이라면 뒷목을 잡을 만한 부분이 많다. 개인적으로 엑스맨 프랜차이즈 최고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울버린이 과거로 돌아가 온갖 개고생을 겪으며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은 과거 캐릭터들과 함께 긴밀한 협력(때로는 반목도 있지만)을 통해 엑스맨 프랜차이즈의 혼란에 가까운 역사를 수정하고, 시리즈를 박살 낼 뻔한 '엑스맨 3'의 결말까지도 바로잡으면서 수렁에 빠질 뻔했던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다시 현재진행형으로 돌려놓는 데에 성공한다.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면 3편의 흑역사를 뒤로 하고 결말부에 다시 살아난 싸이클롭스와 진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영화 '로건'이 감독 제임스 맨골드의 말처럼 평행우주에 속하는 외전이 아니라 정사의 우주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면,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의 주인공들의 노력은 하나의 '헛짓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시간상으로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결말 부분에서 오래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프로페서 엑스의 치매로 인한 발작으로 겨우 살아난 캐릭터들이 다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능력을 잃어버리고 폐인이 되어 사라진다는 설정이니 전작의 팬이라면 도저히 납득하기가 힘들 것이다. 불필요한 언론플레이와 말장난이라고 여길 이들도 있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제작진과 감독이 고민하고 각자의 입장을 내놓는 것에 대해 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로건'의 감동과 여운을 진하게 느끼고 싶은 이들은 감독의 말처럼 이를 자신들의 인식에서 정사에 포함시키면 되는 것이고, '로건'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결말에 더 큰 감흥을 느낀 이들이라면 제작진이 규정한 대로 이를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외전으로 치부하면 영화를 즐기는 데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영화나 프랜차이즈의 팬이 아니라면 이 모든 이야기가 과몰입한 덕후의 장황한 헛소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냥 가공의 캐릭터일 뿐인데 이들이 죽든 말든 뭔 상관이냐, 제작진에서 공인을 하든 말든 그냥 평행우주로 여기든 비공식으로 치부하든 네가 알아서 정신승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게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 갖는 무게감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수단 이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후속작을 만드는 이들이 전작을 훼손하거나 부정하고, 단순히 돈 몇 푼 더 벌기 위해 어이없는 전개를 풀어버리면 소중한 추억이 더럽혀진 느낌,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부정당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러한 사례를 풀자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1, 2편에서 생사를 함께 하며 두터운 사랑을 쌓아온 부부 사이를 대사 몇 마디로 허무하게 갈라놓고, 3편에서 어느 정도 희망을 주는 열린 결말이었음에도 성의 없이 이혼을 확정 지어버린 '다이하드 4.0(영화 자체는 재미있는 편이었다)', 전작의 깔끔한 결말을 뒤엎고 허접한 전개의 연속으로 팬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할로윈 8(영화 자체도 쓰레기였다)', 어느 한 편만 찝어서 이야기하기도 힘들 정도로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전작이나 원작에 대한 예우는 눈을 씻고 바라봐도 찾기가 힘든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당시의 시각으로는 나름 만듦새가 괜찮은 게임 원작 영화였던 1편을 더욱 명작으로 보이게 할 만큼 놀랍게 허접했던 '모탈 컴뱃 2', 게으른 재탕과 신화의 파괴 그리고 허접한 수습으로 3 연타의 트라우마를 안긴 '스타워즈 7, 8, 9', 속편은 아니지만 원작의 명성을 칼로 들쑤셔놓은 듯했던 '고스트버스터즈'의 리메이크와 추억을 더럽히며 돈 벌기에 급급한 디즈니의 대부분의 실사화 작품 등 영화 역사의 흐름은 팬들의 상처와 함께 전개되는 것일까 싶은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후 이야기할 두 작품은 앞서 언급한 이 영화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고, 나로 하여금 이 테마로 글을 쓰게끔 만든 주범(?)들이다.
-이후 2,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