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미묘한 파인 다이닝 요리 같은 호러영화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더 위치' 리뷰

by 핵보컬

어느 날 갑자기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하나씩 공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그의 영화 '더 노스맨'이 올라온 것을 확인했기 때문인데, 마치 게임 '다크 소울'이나 '엘든 링'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와 영상미가 느껴지는 트레일러를 보고 '아, 이건 조만간 꼭 봐야겠다.'라고 생각했고, 막상 보려고 하니 그의 이전 작품들을 관심은 가지면서도 하나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일단 예의상(?) 그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더 위치'와 '라이트하우스'를 먼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위치'는 로버트 에거스의 데뷔작인데 당시에 호러 팬들과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영화의 압도적인 몰입감과 먹어주는 분위기는 공통적으로 찬양하는 분위기였지만, 느리고 지루한 전개와 모호한 내용 등이 비판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기부터 호러 영화를 즐기는 호러매니아였지만, 이상하게도 가족이 파괴되고 위협받는 류의 공포물은 보기 힘들어하는 편이었기에 이 작품은 평가의 호불호를 떠나 관람을 좀 미뤄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전히 손이 잘 가지 않는 작품이기는 했지만, '더 노스맨'을 보기 위한 선행과제라 생각하고 이번 기회에 관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42_IAB_0025_x131.jpg 화...황금나무...??

영화의 내용은 꽤나 단순한 편이다. 1630년대를 배경으로, 다소 과격한 신앙을 갖고 있는 한 가족이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그 때문에 추방을 당하고 척박한 외지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이후 기이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일어나며 갈등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한 사건과 갈등들로 인해 가족은 분열되고 구성원들은 광기에 사로잡히면서 무너져간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본토가 아닌 해외의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왜 호평을 받는지에 대해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한계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실제로 1690년대에 일어났던, 서양에서는 악명이 높은 역사적 사건인 '세일럼 마녀 재판'에 대한 비유에 가까운데, 한 사회의 구성원들끼리 누군가를 의심하고 결국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행위가 일어났던 광기 어린 역사를 한 가족이 분열되는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실제 마녀 재판에서 쓰였던 역사적 기록이나 당시의 설화 등을 대사와 상황에 집어넣고, 17세기의 중세 영어를 충실히 재현한 점 등이 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게 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 생소한 해외의 관객들에게는 다가오지 않는 부분들이다.

4309968-movie_review1-1-570a082eaa7d36be.jpg 영상미와 분위기만은 정말 끝내준다

물론 영국, 미국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좋게 볼 만한 요인들도 충분히 존재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보는 이를 압도하는 분위기, 몰입감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영상미와 음악 및 연출의 요소는 젊은 감독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만듦새를 자랑한다. 기이한 분위기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중간에 영화를 끄고 싶으면서도 뒤의 내용과 결말이 궁금해서 계속 보게끔 만드는 이중적인 면은 웰메이드 호러 영화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징이고, 이러한 면에서 '더 위치'는 호불호와는 별개로 잘 만든 공포물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위치'는 잘 만든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완벽한 작품도 아닌데, 가장 큰 이유는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부에 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결말부에 대한 나의 감상은 "뭐야? 정말 이거였다고?!" 정도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뻔하고 예측 가능한 결말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진중하게 더 깊은 차원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 치고는 느린 전개를 참고 기다려준 관객에게 주는 카타르시스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시대적 배경이나 주제의식에는 맞는 부분이 있기에 납득이 아예 가지 않는 수준은 아니기에 이러한 부분을 좋게 보는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TheWitch_R2__1.27.1-1024x768.jpg 영화를 보다보면 마녀보다 이 쌍둥이들이 더 무섭다...

스케일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그 주제나 전체적인 흐름 및 구성에서는 국내 영화인 '곡성'이 떠오르는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곡성'이 재미와 구성 면에서 더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결말부에서 주는 인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곡성'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뭔가 압도되는 느낌,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찌릿한 기분을 느끼며 "아, 나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정말 대단히 잘 만든 영화이구나."라는 감상을 느꼈지만 '더 위치'의 결말부에서는 "음...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이렇게...?"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전자는 호러에 내성이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지만 후자는 쉽게 추천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다.

hannibal-nbc.jpg 어서...안 먹고 뭐해...?

몇 년 전에 국내에 '파인다이닝'이라는 개념이 한창 정립될 무렵에 우후죽순 등장했던 유학파 셰프들의 신흥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음식설명과 데코레이션 등에 압도되어 굉장한 기대를 갖게 했지만 정작 맛 자체는 미묘했던 경우가 있었다. '더 위치'는 내게 있어서 맛이 미묘한 파인다이닝 코스요리 같은 영화이다. 물론 그런 레스토랑의 경우에도 그들의 열정을 응원해 주고픈 마음이 들었기에 재방문을 한 곳도 있었고, 실제로 재방문했을 시에 훨씬 더 맛있었던 경우도 많았는데 '더 위치'의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경우에도 그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는 기대 정도는 충분히 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색적인 호러 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영화 매니아, 배우 안야 테일러조이의 팬, '유전'과 '미드소마'로 호러 강자로 떠오른 아리 애스터 감독과 더불어 영화계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실력 있는 젊은 감독의 작품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더 위치'를 한 번 관람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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