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행사와 각종 업무로 인해 시침이 상당히 빠르게 돌아간다. 출근 뒤 사무실에서 한숨을 돌리면서 차 한 잔을 준비하던 중 휴대전화의 벨이 울린다. 매우 친숙한 목소리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러 전화해 봤어.”
“네? 아직 살아 있습니다~~”
농담조긴 하지만, 나의 존재를 찾아 주는 분이 있다는 것에 사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교수님에 따르면, 요기 인근에 새들이 날아온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동안 네 번 정도는 이곳을 다녀갔다고 하신다. 통화 저편에 새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는데, 통화음이 좋지 않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교수님은 새들 때문에 이곳에 오시는 거지만, 곁들여서 나의 존재도 기억 속에서 떠오르시는가 보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던 길에 잠시 들러 저녁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어 말씀을 드렸다.
“교수님, 이곳에 오시면 저와 함께 점심 식사나 하고 가시지 그랬어요?”
“아, 새 보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그래도 여기까지 오시면 다음엔 식사나 같이 하셔야지요.”
“알았어.....”
기온의 변화가 극심한 요즘, 환절기에 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셔야 한다는 개인적인 당부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통화는 끝났다.
점심 식사 뒤의 산책 코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장소와 사람은 기억(추억, recall)을 매개로 이어지는 것 같다. 특정 장소에 가면 그 장소와 연관된 대상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그 수많은 대상들 중에서 특정 대상이 먼저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때 기억은 과거의 시점으로 관념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무브먼트이다. 장소와 대상의 맵핑에서 독립 변환 함수인 기억!
생각건대, 기억은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그런 의미에선 실존하는 것 같다. 과거에 존재했던 데이터이면서 현재에서도 끝임 없이 일어나는 일종의 ‘캐노니컬 데이터(cannonical data)’! 물론 망각의 기능도 있지만....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을 매개해 주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싶다. 여기선 기억에 대해 뉴런 차원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만남은 항상 실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메신저, 음성 통화, 영상 통화 등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언어적, 문자적, 시각적 데이터로 만남이 이루어진다. 물리적인 시간과 장소를 극복해 사이버 공간이나 벡터 공간 속에서 숱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런 만남의 형태는 앞으로 더욱더 발전될 것으로 보인다.
SF <스타워즈>의 홀로그램 미팅 장면.
지난 15년간 알고 지낸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실제로 만난 적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 그렇지만 곁에 있는 10년 지기처럼 친근하다. 그 이유는 전화상으로든, 인터넷상으로든 커뮤니케이션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전파로 전달되는 통화상에서, 광통신이나 와이파이를 통한 인터넷상에서 존재하는 가상 실체로 봐도 무방하다. 결국 만남은 앞으론 더 이상 실체를 통하지 않고도 기억을 매개로 메시지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기억이 만남의 매개체라면, ‘기억 기반형 만남 서비스’도 가능할 듯싶다. 뇌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과거의 기억을 백업해 두고, 필요하면 그 기억 속에 등장하는 특별한 사람과 장소를 다시금 정확하게 복원한 뒤, 사이버 공간이나 벡터 공간 속에서 재현하여 가상적으로 만나는 ‘기억 기반형 만남 서비스’. 이때 만남의 장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물리적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일 가능성이 높고, 만남의 대상도 피아를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SF <토탈리콜>에서 기억을 업체로부터 이식하는 장면의 포스터.
<토탈리콜, Total Recall>(폴 버호벤 감독, 1990)에서는 기억을 상업적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이 영화는 필립 딕의 소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을 원작으로 만든 SF 영화로서 주인공이 화성 악몽에 시달리던 중 기억을 도매로 파는 업체인 리콜(Rekall)로부터 화성에 관한 기억을 주입받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토탈리콜>의 화성에 관한 기억 이식의 한 장면.
또 <AI>나 <아일랜드>, <아바타>를 비롯해 다른 SF 영화에도 메인 시스템에 백업된 특정인의 기억을 신제품 로봇이나 복제 인간에 이식해 출시하는 내용도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아바타>에서는 장애인인 주인공의 의식이 나비족인 아바타의 몸속에 빙의(?)하여 육체적 장애를 극복한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기억을 포함해 사람의 의식이 고스란히 전송되는 시스템을 활용한 것이다. 아바타까진 아니지만, 실제로 뇌파 감지 시스템을 이용하여 로봇을 움직이는 기술은 이미 개발이 진행 중이다.
SF <A.I.>의 포스터. 맞춤형 기억 설계로 제작된 인공지능 로봇들
SF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은 아닌 근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사람과 데이터 전송 기반의 전의식(電意識), 그리고 아바타(신제품 로봇, 복제 인간 등)로 이어지는 날도 머지않을 것이라는 것도 나만의 추측일까?
SF <A.I. RISING>의 한 장면.
<AI>, <아일랜드>, <에반게리온>, <토탈리콜>, <더 플라이>, <공각기동대> 등의 SF를 보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다시금 나의 기억들이 또다시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