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나의 마음을 업로드 한다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미래의 인공지능(AI)은 대중문화에서 배운 것들이다. 터미네이터(1984)에서는 인류를 지배하는 기계와 저항하는 인간이 대결한다. 아이로봇(2004)에서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며 인류를 통제하기 시작하고 인격이 있는 로봇이 인간의 명령을 이행할지 말지 결정하는 딜레마를 겪는다. 그녀(2013)는 실연의 아픔을 가진 대필작가가 인격이 있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교감하며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들의 인공지능은 특이점에 도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미래의 인공지능은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인격을 가지거나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된다.
레이 커츠와일은 2040년 경에 인공지능이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류의 미래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고 본다. 반면 유발 하라리 및 닉 보스트롬은 인공지능이 특이점에 도달하게 되면 인류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인공지능의 인류파괴 시나리오는 터미네이터처럼 기계가 인류에 대한 악의를 품기 때문이 아니다. 기계가 인간이 부여한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인류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진지하고 논리적 개연성이 있다.
특이점이 온 인공지능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예상된다. 터미네이터와 같이 물리적 실체가 있는 휴머노이드이거나 그녀의 사만다처럼 어디에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운영체제이다. 인공지능은 생물학적 자연지능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프트웨어적 성격이 핵심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반드시 하드웨어 인프라 위에서 구동된다. 이는 모라벡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 인간과 컴퓨터의 능력을 비교할 때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반대로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컴퓨터에게 쉽다는 역설이다. 예를 들어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모든 경우의 수를 쉽게 계산하지만, 식당에서 접시를 운반하고 설거지를 하는 서빙로봇의 개발은 극도로 어렵다. 특이점이 온다면 물리적 육체보다는 사만다형 인공지능이 먼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구분하는 것처럼 인간도 정신(마음)과 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발전한다면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 하드웨어에 업로드하여 보관하거나 다른 육체에 다운로드하는 기술이 별명 될 수 있고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육체로부터 벗어난 정신이 컴퓨터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심신이원론과 유물론 두 가지의 철학적 관점이 있다.
심신이원론
플라톤과 르네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며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별개의 존재로 보았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정신 또는 마음이 있다. 사람은 세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이를 바탕으로 추론하고, 기억하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나는 내 마음으로 몸을 통제할 수 있으나, 반대로 몸이 정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것은 나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취하면 알코올이 내 정신상태를 변화시키고 몸에 대한 통제도 약해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의 정신만 '나'이며 '술 취한 나'는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몸과 정신이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이런 모순에 도달한다.
유물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명백히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며 모든 현상을 원자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했다. 에피쿠로스도 유물론을 신봉했지만 그 차이가 있었고, 이 차이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이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도 유물론이 있었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정신으로 몸을 극복하는 수행을 했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요가(스포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이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두뇌를 비롯한 신체의 물리적 화학적 작용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유물론이다. 술을 마심으로써 그 화학작용이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정신은 물질에 속박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인간의 몸에는 전기신호가 흐르고 있으며 뇌에서 신호를 주면 내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반대로 팔이나 다리에서 얻은 자극은 신경계를 통해 전기적 신호로 뇌에 도달해서 사물을 인식한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는 인간은 전기적 신호로 통제되는 존재이므로, 그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것이 가능하다.
제3의 관점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무아상경'에 있는 다음 구절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의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이것은' 육체(물질)와 정신 둘 다를 가리키며 무아상경은 심신이원론도 유물론도 아닌 제3의 관점이다. 붓다는 모든 것이 변화하므로 무엇도 실체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몸의 모든 구성요소는 계속해서 변한다. 영원해 보이는 인간의 뼈도 10년이면 그 구성요소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므로 10년 전의 나의 몸과 현재의 나의 몸은 같지 않다. 마치 흐르는 강은 한결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 분자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강은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한강'이라고 불렀던 것을 오늘은 '한강'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듯이, 육체가 계속 변한다고 해서 '나'가 아니라고는 것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든다.
정신은 육체보다 더 자주 바뀐다. 밥을 먹고 포도당이 나의 뇌에 충분히 공급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정신상태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의 뇌에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고 한강을 알고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한다. 정신이 변하더라도 나의 기억이 계속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나의 아버지가 어느 날 치매에 걸려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아버지의 정신이 바뀌었다고 해서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불교에서는 '나'를 원인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며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나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해보자. 육체는 없지만 나의 모든 기억이 업로드되어 있다면 이것은 '나'가 되는 것일까? 보통은 죽은 후에 나의 기억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가능하다. 내가 살아 있으며 똑같은 경험을 한 기억이 컴퓨터에 업로드되었다. 둘 중 어느 게 진짜 나일까? 혹은 둘 다 나일까?
심신이원론으로 보면 정신은 불변한 독립적인 것이므로 컴퓨터에 완전히 이주할 수 있다. 컴퓨터에 업로드된 나의 기억은 '나'가 된다. 유물론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나'는 복제가 가능하다. 비록 원본-복제품의 딜레마가 있을 지어도 인간은 뇌의 전기화학적 결과일 뿐이다. 불교의 무아론적 관점으로 보면 '나'를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나'라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오직 관계를 맺는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특이점이 온다면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수 있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불안이 촉발한다. 나는 불교의 관점을 지지한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 연속성이 아니라 관계의 연속성에 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밥상머리 잔소리를 하는 순간에만 '나'가 존재한다. 무아 사상은 존재의 덧없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한다. 영생을 원한다면 매 순간을 죽음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릴 때 '나'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