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언제나 어떤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느낌은 다섯 감각의 장(場) 안에서 발생한다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촉지 하는 것 — 이 감각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즐거움, 아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감각적 아름다움은 언제나 일시적이다. 그것은사라질 운명을 내포하고 있으며, 바로 그 유한성이 괴로움의 가능성을 품는다. 감각의 장에서 피어나는 기쁨은 소멸을 전제한다.
의식은 그 소멸을 예감하며, 두려움과 탐닉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이 멈추는 순간, 의식은 그 지향을 잃고 순수한 현전의 상태로 이행한다. 그 자리에서 드러나는 희열이 바로 아난다(ānanda)이다. 이것은 자극이나 정서적 원인에 의존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삐띠(pīti), 기쁨과 수카(sukha), 즐거움이다. 그것은 대상화 이전의 의식, 즉 지향 없는 의식의고요로부터 발생한다. 이때의 기쁨은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다.
그곳에서는 의지가 작동하지 않고,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라진다. 기쁨과 행복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의지가 사라진 자리는 결핍이 아니라 완결이다.
모든 운동이 멈춘 그곳에서, 의식은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않지만, 존재 전체가 이미 행복으로 있다. 감각적 체험이 소멸한 이후에도,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투명한 평화의 상태로 머문다. 그 평화는 의식의 움직임이 멈춘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존재의 현전이다.
‘몸이 사라진다’는 말 또한 소멸의 의미가 아니다. 몸을세계 속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몸을 지각하던 의식이 더 이상 거기에 초점을 두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짐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의식의 방향 전환, 혹은 지각의 전환이다.
의식은 본래 움직임을 향한다. 움직임은 감각을 일으키고, 감각은 욕망과 의지를 불러낸다. 그러나 욕망과 의지는 필연적으로 긴장을 동반한다. 그 긴장이란 주의를 기울이는 의식에 가깝다. 의식이 긴장을 자각하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의식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대상을 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운동하는 존재였음을 인식한다. 이때 의식은 자기 대상화로부터 벗어나 ‘멈춤’을 경험한다.
그 멈춤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은 현전의 상태다. 정지는 소멸이 아니라 지각의 완화이며, 사라짐은 부재가 아니라 의식의 이완이다.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이 더 이상 그것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라짐’은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의식의 변용이다. 의식은 지각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고요는 모든 지각이 대상화되기 이전의 자리, 즉 의식이 자기 자신을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타난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시작의 조건이다. 움직임이 멈출 때,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고요가 완성될 때, 새로운 생명이 피어난다.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이 자기 본래의 중심으로 되돌아올 때 발생하는 존재의 현상이 다. 행복은 외부 조건의 결과가 아니다. 내면의 평온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 행복은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그러므로 행복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애씀보다는 멈춤 속에서, 긴장보다는 이완 속에서, 존재의 향기는 드러난다.
‘알아차림’은 의식이 자기 자신을 향해 열리는 문이다. 그 문이 열릴 때, 몸도 마음도, 그리고 호흡도 고요해진다.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의식의 운동이 멈춘 자리에서 드러나는 투명한 현전이다. 모든 것은 잠시 정지하고, 잠시 사라진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다. 의식은 근원으로 돌아가며, 그 자리에서 행복과 기쁨, 아름다움과 감사의 존재의 향기가 피어난다. 그것들은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향이 멈추고, 의식이 고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 순간, 그곳에서 우리는 의식의 현상학, 곧 존재의 자각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