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희 Aug 10. 2023

늑대의 유혹

비가 오니 그대들은 더 가까워졌구나.

아침부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제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는 소식은 넌지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뉴스 기사를 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나에게 중앙 재난 대책 안전본부 문자를 선두로 행정안전부, 영등포구, 양천구청, 산림청, 구로구청, 광명시청 등등 끝도 없이 문자가 도착했다.



아래 지방은 열차와 항공 운행이 중단되었고, 어느 지역은 주민 대피가 진행된다는 기사가 보인다. 윗동네에 있는 나는 크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저 아랫지방에 있는 지인들에 대한 걱정과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저 바쁘고 빠른 동네인 서울은 카페 창문 밖으로 끊임없이 우비를 입은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발길을 서두른다. 유독 그 사이에서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눈이 크고 잘생긴 남자가 한쪽 어깨가 다 젖었는데도 해맑게 웃으며 여자를 감싸고 있다. 마치 포대기를 덮은 소중한 아기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비 한 방울 안 맞게 하려는 몸짓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문득 강동원이 나온 늑대의 유혹 명장면이 생각났다. 물론 나는 늑대의 유혹을 본 세대는 아니다. 영화 늑대의 유혹이 개봉한 2004년에 나는 합기도를 열심히 다니던 9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런데도 강동원이 우산 밑으로 뛰어 들어간 그 명장면은 내 세대에서도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로 생각한다. 20년이 지났지만, 강렬한 장면은 역시나 잊기가 어렵다.


연애를 해본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늘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반대쪽 손으로는 내 어깨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도록 손등으로 연인의 어깨를 감싼다. 우산은 15도가량 기울여 바람이 불어도 젖지 않도록 약간의 재치를 더한다.




그래. 돌이켜 보니 참 예쁘고 좋은 추억들이다. 물론 지금은 우산 하나를 온전히 혼자 쓰고 있다. 내 소중한 한쪽 어깨를 희생하지 않아도 되니 우산이 사뭇 더 크게 느껴진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우산을 반대로 15도 기울여 준다.

아, 뽀송뽀송한 내 상의를 보라. 지나가는 저 남자는 느끼지 못하는 이 쾌적함. 왠지 모르게 오늘도 진 기분이 든다.

이런 된장.

매거진의 이전글 남과 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