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JYP 엔터테인먼트 창업자는 그때 무대에 오르기로 선택했다.
열 네 살 때였다. 박진영은 친구의 누나를 짝사랑하게 됐다. 박진영은 어렵게 친구 누나에게 고백을 했다. 추석 시즌에 을지로 대한극장에서 만나서 영화 플래시 댄스를 함께 보면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박진영은 한 시간을 기다렸다. 친구 누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친구 누나는 당시 인기 있었던 롤러 스케이트장의 DJ와 사귀기로 했던 것이었다. 박진영에게는 친동생에게 미안해서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댔었다. 박진영은 상처 받았다. 1985년 중학교 2학년의 가을날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박진영은 전국 아마추어 댄스 경연대회에 출전했다. 그때 심사위원이 롤러 스케이트장 DJ였다. 박진영은 잘 나가는 롤러 스케이트장 DJ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생이 된 박진영은 작곡가 김형석의 지도를 받아서 데뷔곡 날 떠나지마를 작곡했다. 김형석은 박진영에게 작곡의 ABC를 가르쳤다. 박진영은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박진영은 23세 때인 1994년 날 떠나지마로 데뷔했다. 정작 1년이 넘도록 방송 출연 한 번 하지 못했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왔다. 제일기획이 신인 배우 정우성을 모델로 내세운 오리온의 센스민트 껌 광고에 우연히 박진영의 날 떠나지마를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다. 이유는 유통사였다. 박진영 1집 앨범의 유통사가 삼성뮤직이었다. 삼성뮤직과 제일기획은 같은 삼성그룹 계열사였다. 날 떠나지마는 인기곡이 됐고 마침내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날 떠나지마는 유명해졌지만 박진영은 여전히 얼굴 없는 가수였다. 날 떠나지마를 부른 가수를 정우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진영은 예능 출연으로 얼굴을 알렸다.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출신 대중음악 가수라는 타이틀이 1994년 당시에는 통하는 마케팅 포인트였다. 예능 PD들은 박진영을 명문대 출신 딴따라라고 소개했다. 박진영은 그렇게 스타가 됐다.
어느날 박진영은 SBS 방송국에서 롤러 스케이트장 DJ와 다시 마주쳤다. 롤러 스케이트장 DJ는 당연히 박진영을 알아보지 못했다. 롤러 스케이트장 DJ는 자신을 박진영의 팬인 신인가수라고 소개했다. 박진영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열심히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박진영은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떠나보냈다.
지난 2024년 9월 16일 오후 8시 30분이었다. 박진영은 2024년 9월 16일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KBS 추석 특집 대기획 딴따라 JYP 공연에서 날 떠나지마를 라이브로 불렀다. 1994년 SBS 복도에서 롤러 스케이트장 DJ와 마주쳤을 때도 2004년 KBS 무대에서 날 떠나지마를 부를 때도 박진영은 변함 없이 딴따라였다. 그리고 박진영은 자신이 키워낸 K팝의 딴따라들을 무대 위로 소환했다.
“쳐다보기만 해도 애틋한 그룹이다. 내가 미국에 억지로 끌고 가는 바람에.” 박진영은 원더걸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KBS 대기획 데뷔 30주년 특집 딴따라 JYP에서 주인공 박진영은 무대 위에 원더걸스를 초대했다. 선미, 선예, 유빈이 박진영과 함께 무대 위에 올랐다. 원더걸스의 리더 선예가 박진영과 듀엣곡 대낮에 한 이별을 불렀다. 선미가 When We Disco를 박진영과 함께 공연했다.
무대 위에서 박진영은 원더걸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원더걸스는 K팝 최초로 미국 시장에 도전한 걸그룹 중 하나다. 무엇보다 원더걸스는 2009년 10월 31일 노바디로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에서 76위에 올랐다. K팝 그룹으로서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는 최초였다.
원더걸스는 이 기록으로 K팝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이정표를 세웠다. 최초의 기록은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은 엔터테인먼트적으론 쉽지도 않았고 비즈니스적으론 옳지도 않았다. 억지로라는 박진영의 말이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2009년 6월 박진영은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영어버전으로 발표하면서 미국 진출에 도전한다. 조나스 브라더스의 북미 투어 공연에 참여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된다. 내친 김에 CAA와 에이전트 계약까지 체결하면서 미국 시장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는 2008년 금융 위기 직후였다. 미국 음반 시장까지 얼어붙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K팝이 하나의 장르라 자리잡기도 훨씬 전이었다. 퍼스트 펭귄 원더걸스의 도전은 후배 K팝 그룹의 발판이 됐지만 정작 원더걸스는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다. 어쩌면 원더걸스가 미국 시장보다 한국 시장이나 아시아 시장을 더 겨냥했었다면 당대 라이벌이었던 소녀시대가 걸었던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원더걸스는 아시아를 건너뛰고 북미로 가버렸고 그만큼이 기회 비용을 지불했다. JYP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은 JYP가 상장되기 전이었다. 상장을 위해선 안정적인 매출과 영업이익으로 숫자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억지로 미국 시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JYP엔터테인먼트는 캐시카우를 잃었고 결과적으로 상장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결국 JYP엔터테인먼트는 2010년 12월 코스닥 상장사인 제이튠엔터테인먼트와 합병을 통한 우회 상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원더걸스의 빌보드 핫100 차트인은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진 역사적 기록이었다.
1997년 박진영이 JYP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태흥기획을 설립한 순간부터 박진영과 JYP엔터테인먼트의 역사는 박진영과 JYP가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과정이었다. 날 떠나지마는 박진영이 작곡가 김형석의 도움을 받아서 작곡한 자작곡이었다. 1년 동안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방송 출연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박진영이 처음 TV 무대에 올랐을 때 비닐 바지를 입은 그래서였다. 이후에 박진영은 예능 무대에선 엘리트 딴따라로 자신을 마케팅해서 스타덤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날 떠나지마의 성공방정식은 고스란히 JYP엔터테인먼트의 성공공식이 됐다. 흑인 음악 베이스의 댄스곡에, 파격적이고 섹시하기까지 한 무대 퍼포먼스, 광고나 드라마나 예능을 활용한 확산, 여기에 스타의 개인기였다. 이걸 완벽하게 구현한 스타가 바로 비였다. 비는 박진영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고 덕분에 2000년대 초반 JYP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시장의 신흥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지오디의 성공과 비의 흥행으로 JYP엔터테인먼트는 3개 기획사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지오디는 지오디의 육아일기로 10대 아이돌에서 국민 아이돌로 거듭난다. 박진영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시장을 확장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2006년 2월 비의 미국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은 박진영이 미국 진출을 본격 꿈꾸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한국 시장 확장을 넘어서서 글로벌 시장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박진영은 이미 JYP의 수석 작곡가인 방시혁과 함꼐 1년 동안 맨 땅에 헤딩하듯이 LA에 머물면서 미국 진출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비의 공연이 성공하면서 박진영은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노리게 된다. 이건 박진영 본인의 음악 세계에선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박진영은 미국의 흑인 음악을 베이스로 한국적 가사와 한국적 멜로디를 결합하는 프로듀서였다. 박진영에게 미국 시장 진출이란 결국 자신의 음악을 인정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음악인 박진영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에 JYP엔터테인먼트엔 미국 시장은 고비용 저효율 시장일 뿐이었다.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JYP엔터테인먼트의 라이벌인 SM엔터테인먼트와 YG엔터테인먼트는 소녀시대와 빅뱅으로 아시아 시장을 주름잡으면서 매출과 상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롤 모두 잡았다. 박진영에게 미국은 언제나 꿈이면서 리스크였다.
2010년 우회상장으로 코스닥에 상장된 이후 JYP엔터테인먼트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는다. ㈜JYP와 JYP엔터테인먼트로 법인부터가 2개였다. 공개 시장에 오픈된 상장 회사는 분기마다 실적 압박을 겪었고 이때부터 박진영과 JYP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JYP의 경영을 맡은 정욱 대표는 박진영과 오랜 친구 관계였다. 정욱 대표도 음악 잡지 편집장을 했던 음악 마니아였다. 단지 박진영이 흑인 음악 마니아였다면 정욱은 백인 음악 마니아였다. 정욱 대표와 박진영의 벤치마크는 러셀 시몬스와 릭 루빈이 공동 설립한 데프잼 레코드였다. 정욱 대표는 2000년대 내내 박진영에게 릭 루빈이 돼 줬다.
그렇지만 상장 이후엔 박진영과 JYP의 관계는 변화가 불가피했다. 박진영이 꿈과 JYP의 목표를 구분해야만 했던 것이다. 2013년 6월 ㈜JYP와 JYP엔터테인먼트의 합병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합병 결과로 박진영의 지분은 16.9%까지 줄어들게 된다. 창업자로서 여전히 최대 주주였지만 그렇다고 과반 주주는 아니게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박진영과 JYP가 서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박진영은 프로듀서로서 그리고 JYP는 기획사로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결과가 2016년 데뷔한 트와이스였다. 트와이스는 2024년 데뷔 9주년을 맞이했다. 블랙핑크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YG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것과 달리 트와이스는 여전히 JYP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트와이스는 2024년 7월 일본 닛산 스타디움에서 공연했다. 일본의 해외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이었다. 트와이스는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원더걸스의 후배다운 실력을 보여줬지만 원더걸스와 다르게 무리하게 미국 시장을 겨냥하지도 않았다. 차곡차곡 아시아 시장에서 팬덤을 쌓았고 롱런 걸그룹의 대명사가 됐다.
2016년 트와이스의 성공 이후 JYP엔터테인먼트의 실적도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JYP엔터테인먼트의 매출은 2017년 1000억 원을 넘어선다.
2024년 현재 JYP엔터테인먼트의 신성장 동력은 스튜디오J다. 하이브의 멀티레이블 체제를 JYP식으로 해석한 것이 스튜디오J다. 문호윤 본부장을 중심으로 기존 박진영 수석 프로듀서 체제와는 다른 팀들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아이돌팀이 데이식스다. 데이식스는 힙합 그룹이 아니라 밴드 그룹이다. 1990년대 미국 흑인 음악인 뉴잭스윙에 기반했던 박진영의 색깔과는 완전히 다르다. 엑스디너리 히어로즈도 마찬가지다. JYP는 스튜디오J를 통해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장하나가고 있다.
동시에 스트레이 키즈도 지오디부터 2PM을 거쳐 2024년까지 이어지는 보이 그룹의 경쟁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스트레이 키즈는 2PM과 갓세븐 같은 선배 그룹의 날렵한 섹시함을 재현하고 있다. 박진영 DNA 특유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스트레이 키즈가 글로벌 레벨로 끌어올리는 모양새다. 게다가 스트레이 키즈는 쓰리라차라는 그룹 내 3인조 프로듀싱팀까지 갖추고 있다. 방찬, 창빈, 한과로 이뤄진 쓰리라차는 스트레이 키즈의 프로듀싱을 맡고 있고 덕분에 고난도와 안무와 음악을 소화하는 팀이 됐다.
스트레이 키즈와 트와이스는 JYP엔터테인먼트의 실적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스트레이 키즈는 빌보드 200에서 5연속 1위에 올랐다. 트아이스는 스타디움 아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공연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여기에 페스티벌에선 데이식스가 밴드 음악으로 공연 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결국 K팝의 실적은 음원 판매와 공연 판매에 기반하게 돼 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음악으로 2가지 실적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음악에 집중하는 JYP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은 팬덤 기반인 아이돌 산업에서 경쟁사들한테 밀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이브도 SM엔터테인먼트도 강력한 팬덤을 기반으로 굿즈와 공연 판매로 성장해왔다.
반면에 JYP엔터테인먼트는 상대적으로 팬덤보단 음악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도 밴드부터 힙합까지 다양한 취향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음반 레이블로서는 정통파지만 팬덤에 기반한 K팝 기획사로서는 비주류인 것이다.
이것이 고스란히 실적으로도 드러난다. 2024년 2분기 JYP엔터테인먼트의 실적은 솔직히 어닝 쇼크 수준이었다. 매출은 957억 원으로 저년 동기 대비 37%가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93억 원으로 증권가 전망치였던 216억 원에 훨씬 못 미쳤다.
원인은 스트레이 키즈와 트와이스의 국내 활동 공백이었다. 사실 JYP엔터테인먼트의 주가는 2024년 1월부터 내내 하락해왔다. 1분기부터 음원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하락세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2024년 상반기 전체로 놓고 보면 매출은 2322억 원으로 2023년 상반기 대비 13.9%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429억 원으로 51%가 감소헀다.
그런데 여기엔 또 다른 변수가 있다. 스트레이 키즈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시장이 북미 시장인 것이다. 스트레이 키즈는 빌보드 정상에 오르면서 북미 시장에서 인기를 입증했다. 이제 스트레이 키즈가 또 다른 BTS가 되느냐의 기로에 다다른 것이다. 당연히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50%나 감소한 건 결국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해 쓰는 비용이 증가해서다. 이번에도 북미 시장은 JYP와 박진영의 꿈이자 리스크다.
방시혁과의 1년 LA 하숙생활부터 비의 메디스 스퀘어 가든 성공부터 원더걸스의 빌보드 차트인까지, 박진영은 지난 30년 동안 한결 같이 북미 시장에서 K팝이 주류로 인정 받게 만들기 위해 도전해왔다.
KBS 대기획의 제목은 박진영의 2집 앨범 제목을 따라서 딴따라였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지난 30년을 짓는다면 헬로우 아메리카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K팝은 방시혁 의장의 BTS를 통해 팝 시장의 정상에 진입했다. BTS의 군백기인 지금은 어떤 면에선 K팝의 정상 공백기다. 그 자리를 박진영 프로듀서와 스트레이 키즈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1월 박진영은 슈카월드에 출연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진짜 좋은 타이밍이다. 여윳돈만 있으면 주식 산다.” 당시 10만 원 안팎이었다. 지금은 5만 원 안팎이다. 그 자신감은 지금 JYP의 IP들이 구축한 포트폴리오에 있는 것이다. 3분기가 지났지만 아직 JYP엔터테인먼트는 박진영의 장담을 입증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남이 있다. 역설적으로 박진영은 2024년이라는 IP 브릿지 공백기를 스스로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감당했다. 2024년 12월 말까지 이어질 박진영의 30주년 기념 공연은 프로듀서 박진영이 가수 박진영으로서 JPY를 하드캐리하는 장면인 것이다. 박진영은 JYP의 창업자이자 최고창의성책임자이기 이전에 날 떠나지마로 무대를 뒤집어버린 댄스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열 네 살 때의 짝사랑이었다. 날 떠나지마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