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는 갤러리
2020.02.07. (금) ~ 2020.05.10. (일)
관람시간
*연중무휴 오전 10시 ~ 오후 8시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혹한의 언 땅을 뚫고 움트는 어린잎처럼 세상과 삶에 대한 열망이 예술로 탄생되고 나아가 끝없이 영원하기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들여다본다는 메세지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한 낙원이자 영원한 유토피아를 향한 마음을 9명의 작가를 통해, 각 작품이 어떠한 희망을 담아내고 있는지, 어떠한 모양과 색,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전시라고 한다.
전시의 제목이 주는 힘을 여러모로 믿는지라 겨울이 지나가고 봄을 맞이하는 때에 전시를 보게 되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자면 영원의 숲, 서정적이었던 전시 소개와는 거리가 참 멀었던 전시라고 생각이 들지만,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실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좋았다.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조지 콘도, 헤르난 바스, 리우 웨이, 백남준, 무라카미 다카시, 우고 론디노네
전시의 첫 작품은 첫인상과 같은 느낌이려나, "남준이형 작품이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친숙한 시작이었다. 자유로운 화면을 통해 시작되는 어딘가를 향한 상상, 다른 세계와의 넘나듦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데, 유토피아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불교의 이상향을 나타내는 듯한 이미지들이 열반에 오를 수 있는 세계를 나타내고 그것을 연결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맛이 있었다.
유토피아 :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
열반 :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
현대 사회와 도시, 경험 방식에 대한 질문을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다는 리우 웨이의 무채색 그림 두 점이 있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선들은 모호한 풍경을, 삭막한 선들 사이로는 아무도 소유하거나 들어갈 수 없는 땅을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미묘한 희망을 준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주하는 것 같다.
추상 미술의 그 모호함과 어리둥절한 느낌, 작가의 의도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험을 빗대어 작품을 감상한다면 겨울 같다는 생각이다. 영원의 숲, 봄이 오기 전 어둡고 삭막한 겨울도 결국은 지나가고, 무엇이든 피어나는 봄이 온다는 메세지가 아닐까?
이번 전시는 헤르난 바스의 발견이지 않았나 싶다.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가장 어두운 벽으로 칠해진 두 번째 전시실은 작품의 색감으로 빛을 발한다.
동성애자이기도 한 헤르난 바스의 작품에서는 대체로 마르고 여린, 퇴폐적이며 몽환적인 소년들이 등장한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인간이 처한 불안정과 정체성이 불확실한 과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안을 작품에 담는다고 한다.
바스는 동시대 미술보다는 수 세기 전 유럽 거장들의 작품에 매혹되어 고전적 거장다운 그림을 추구하되 현대적인 미가 더해진 작업을 한다고 한다.
미술, 문학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고도 하는데, 그래서일까 작품의 제목들도 몽환적인 느낌을 더하는 것 같다. 번역기를 돌렸다.
이런 작은 부분이 좋다. 아크릴의 덩어리감이 참 좋다.
작은 휴게공간이 전시장 가운데 놓여있다. 얕은 수면 위로 비추는 헤르난 바스의 작품들이 꼭 뭐 같기도 해서, 한 두바퀴 돌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조지 콘도는 모든 사람의 시선은 주체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철학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시선을 작품에 표현한다고 한다. 철학적으로 해석해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그린다는 메세지답게 한 얼굴에 여러 표정과 여러 감정이 담겨있다.
과장되어 보이는 인물상은 아마도 일상생활에서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 싶다. 표정 관리를 못하는 게 흠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솔직한 표정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표정으로 보여질까
인간의 존재와 불안함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세 폭짜리 그림(Triptych)이다.
강렬한 색감 속 뒤틀린 형체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작품 속 그림자에 눈이 더 갔던 것 같다. 신체에 비해 그림자는 참 비실비실, 겉과 속에 대한 생각을 잠시하고 베이컨을 먹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하고 넘어갔다.
"예술가는 특별한 감성을 받은 대신 평범한 삶을 빼앗긴 신의 형벌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이단아라 불리던 프랜시스 베이컨,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니 존재의 왜곡, 불안함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https://www.francis-bacon.com/art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오마주한 작품, 귀여우면서도 더 위험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대중 예술(popular art), 팝아트의 거장, 오타쿠 문화를 미술 시장에 끌고 나온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상징적인 캐릭터를 이용한 작품이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아 아쉽지만 반짝거린다.
기법을 찾아보니 'offset lithogragh(옵셋 석판화)'라 적혀있다. 포스터나 상업 미술에 많이 사용되는 기법이며 다양한 질감과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 인쇄, 옵셋 인쇄로 두 가지로 비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프린터는 디지털 인쇄, 직접 인쇄이고 옵셋 인쇄는 인쇄판이 직접 종이에 닿지 않는 간접 인쇄이다. 때문에 종이뿐만 아니라 금속, 유리 등에도 인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옵셋 석판화, 실크 스크린 등이 사용된 작품은 보통 작품명 뒤에 'edition of 숫자'가 붙는 것 같다.
1층 전시실의 시작과 마지막은 백남준의 작품이다.
백남준은 본인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작품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율곡, 밥 호프, 히치콕 등 이 작품은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새'에 나오는 인물, 동물, 사물이 작품을 이루고 있다.
작품 설명란의 문장이 제법이었다. 예술이란 건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의미부여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졌다.
'흘러내리는 새들이 점령해버린 기묘한 모니터에서 히치콕의 세계와 백남준의 세계가, 그리고 '지금 여기'가 교차한다.'
2층 전시실의 입구부터 반겨주는 작품이다. 대규모 설치 작품,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우고 론디노네는 시에 관심이 많아 시적인 풍경을 많이 작업한다고 한다.
'나쁜 날들은 끝났다(dog dats are over)'라는 시구(詩句)를 표현한 작품, 바닥의 정체모를 꽃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앤디 워홀의 꽃 시리즈, 마찬가지로 'edition of'가 붙어있다.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대량 생산된 작품들이 패턴화 되고 색감마저 다르니 복제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모여있어서 더 예쁜 것 같다.
꽃에 이어 나비가 펼쳐진다. 잠시 잊고 있었던 영원의 숲이라는 타이틀을 이렇게나마 꺼내게 되었던 것 같다.
데미안 허스트는 생과 사를 주제로 많은 작업을 한다고 한다. 작업하던 캔버스에 우연히 파리가 떨어지면서 시작되었다는 곤충 시리즈, 살아생전보다 화려하게 죽어있는 나비들을 보며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데미안 허스트 - beautiful fiery feathers painting, beautiful exploding amazing it's a beautiful world party spin painting
스팟 페인팅 시리즈 작품이 좋았다. 첫인상이야 이건 또 뭘까 싶었지만 이내 어렸을 적 착한 일 하면 이름 위에 붙이던 스티커가 생각났다.
제목을 단숨에 이해했다면 얼추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영어와는 그리 친하지 않은지라 친절한 한국어 작품 설명을 검색했다.
오릭 염화물, 오로우스 요오드화... 작품을 보고 곧바로 '약'을 떠올리는 사람도 뭐, 있을 수는 있겠지, 알약 시리즈의 메세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실제 약이 어떤 효능을 하며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약국, 약사, 약의 디자인 때문에 신뢰감을 느끼는 것처럼, 정체모를 알약 또한 그저 보이는 형태와 색채만으로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메세지였다. 후에 약국 시리즈의 작품을 보면 반가울 것 같다.
"푸른 공에 관람객 자신이 비침으로써 작품 일부가 된 듯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제프 쿤스가 파라다이스 시티에 방문했을 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아트 스페이스 입구에서 만났었지만 2층 출구로 나와 시선 아래로 보았을 때 더 좋았던지라 사진을 남겼다.
[영원의 숲 : Eternal Forest], 타이틀에 너무 기대했던지라 자꾸 생각이 나는 것 같다. 그래도 시설과 환경이 참 좋아서 좋은 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트 스페이스를 나와서 이어지는 호텔 곳곳의 예술 작품들도 국고로 작품을 구입해야 하는 국립미술관들에서는 볼 수 없는 고가의 작품들이라 눈길이 갔다. 수가 참 많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사설 미술관이 없던 나라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했다. 수준 높아지는 현대미술을 열심히 눈에 담아야겠다.
ps. 전시가 끝난 뒤 전시를 후기하는 거, 참 묘하다.